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꿘녜 Mar 13. 2021

취향이 가난하다 느껴질 때

종각 이자카야였다. 내 취향의 가난함이 여실히 드러났던 곳.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함께 했던 사람들, 장소, 분위기까지 또렷이 기억난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고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는 영화가 뭐야?


이토록 쉬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한 건 나뿐이었다. 모두 저마다의 인생영화를 꺼내놓으며 그 영화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신나게 이야기하는데 나만 초조했다. 음. 뭐였더라. 나도 좋아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뭐였지. 어색한 웃음으로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화제는 어느 순간 음악으로 건너갔다. 어떤 가수 제일 좋아해?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만 화장실을 여러 번 다녀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흔하디 흔한 취향 질문에 멋드러진 답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화장실로, 맥주잔 속으로, 과장된 웃음으로 자꾸만 도망쳤다.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이 정말 없었을까? 아니다. 분명 있었다. 다만, 부끄러웠다. 좋아하는 장르들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데 “나 이거 진짜 좋아해!”라고 힘주어 말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당시에는 제대로 된 영화나 음악을 가까이 두지 못하는 편이기도 했다. 물론 예전에 보고 들었던 감명 깊은 콘텐츠를 얘기할 수 있었겠지만 오랫동안 멀리 두고 지내다 보면 정말 생각이 잘 안 나질 않나. 그래서 어줍잖게 이야기 하느니 그냥 안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책이나 작가를 물었다면 어렵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최근에 어떤 문장을 읽고 마음이 쿵 내려 앉았는지, 휴대폰 메모장에 어떤 글귀를 적어두고 다니는지, 어떤 작가의 글이 나랑 잘 맞는지 물어줬다면 분명 신나게 떠들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나와 맞지 않는 취향 질문 앞에서 마치 가난한 취향을 가진 사람 마냥 자꾸만 위축됐다.


지금에서야 “나는 영화나 음악도 좋지만 책에 더 감동을 많이 느끼는 편이야.”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내가 그런 사람인 줄도, 그렇게 이야기해도 되는 줄도 몰랐다. 인생 영화가 별로 없으니 추천해달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들의 취향을 귀담아듣고 내 취향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면 나는 그 날을 풍요로운 대화가 오갔던 자리로 기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못내 아쉽다.


하지만 부끄러운 경험이었다고 해서 필히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런 자극들 덕분에 내가 가진 취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취향이 가난했던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가난했다. 반짝이는 것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취향’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 몰랐고 그것들을 드러내는 방법에도 어리숙했던 것이다. 남들이 다 좋아하는 분야라고 해서 나 역시 좋아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영화나 음악에 대한 질문은 지금도 종종 모임에서 주고받는 단골 질문이다. 이제는 그런 질문이 반갑다. 팔레트에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 물감을 짜 놓고 다채로운 색으로 섞어 우리만의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연스럽게 물드는 조화로운 분위기에 늘 심취한다.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가는 취향도 좋지만 사람들 속에서 피어나는 취향 지도 안에서 탐험을 해보는 것도 색다른 묘미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취향이라면 실패할 확률이 낮기 때문에.


내가 가진 취향에 ‘초라함’이라는 딱지는 붙이지 말 것. 때로는 취향이 없을 수 있음을 받아들일 것. 주변 사람들에게 잠시 빌린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내가 원하는 색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게 될 수도 있으니 질문을 주고받는 것에 쭉 마음을 열어둔 채 살아가고 싶다. 취향에 정답은 없으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