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 묻는다면 여러 가지를 답할 수 있겠지만 가장 솔직한 대답은 ‘책 읽는 내 모습이 좋아서’다.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멍하니 보고 있는 것보다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이 좋고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재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좋다. 특히 주말마다 청소를 끝내 놓고 침대에 걸터앉아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스스로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흐뭇할 때가 많다.
다독가는 아니다. 책의 취향이 확고하거나 전문적인 편도 아니다. 독서 모임이나 스터디 같은 것도 따로 하지 않는다. 남들처럼 책에 대한 서평을 꾸준히 써본 적도 없다. 나는 단지, 그냥 내가 일궈 나가는 삶의 모습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책 읽는 모습’이기에 그 순간을 매일 조금씩 늘려나가고 즐길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것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이 좋아서라니. 나르시시즘적 성향과 맞닿아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삶의 태도는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의외로 자주 만날 수 있다. 직업을 선택하는 신중한 문제에도, 사람들을 만나는 일상적인 순간에도 모두 해당된다. 내가 고려하고 있는 직업에 놓여 있는 자신을 상상했을 때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가 누군가에게는 선택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만남으로 인해 안정을 찾고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불안과 상처로 인해 괴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 관계의 매듭을 지을 때가 많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판단이 쉽게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판단이 흐려진 경우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내게 어떤 도움을 주는 것임에는 분명해 보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내키지 않을 때. 책 읽는 행위와 같이 간단하고 명료한 문제가 아니라,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인간관계나 생계가 달린 직업적인 문제가 특히 그렇다.
나는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우선 사진을 찍어 둔다. 실제 사진은 아니다. 괴로운 순간,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들을 머릿속에서 셔터를 누르며 최대한 간직하려고 노력한다. 기억의 조각으로, 또는 기록의 조각으로 남은 것들을 모아 두고 제3자의 관점에서 찬찬히 바라본다. 내가 선망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인지,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판단 연습을 하다 보면 선명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의 급작스러운 변화를 가져다주진 않아도 서서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몸을 틀 수 있었다.
좋아하는 내 모습이 점점 더 많아지는 삶을 살고 싶다.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라고 했던 니체의 말처럼 다시 태어나도 동일한 삶을 사는 나 자신이 미워 보이지 않게, 지금 내 삶을 잘 일구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다.
책 읽는 내 모습이 좋아서 꾸준히 책을 가까이했더니 이제는 글 쓰는 내 모습이 좋아진다. 카페에 앉아 글감을 고민하고 문장을 나열하고 단어를 고르는 내 모습이 정말 좋다. 이렇게 좋아지기 시작한 모습들은 웬만하면 쉽게 질리지 않았으니 나는 나와 잘 지내는 방법을 어느 정도 체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