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와인을 좋아한다. 몇 년 전까진 좋아하긴 커녕 마셔 본 경험도 거의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서서히 좋아하게 되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와인은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때나 한 잔씩 마시던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의 나는 와인을 마시는 것보다도 '와인을 마시는 나'를 더 좋아했다. 왜, 와인 하면 괜히 떠오르는 고급스럽고 분위기있는 이미지 있잖아. 나는 그런 이미지에 취해 와인을 가끔씩 마시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와인은 그냥 와인인데. 아마 그땐 뱅쇼를 마셔본 적도 없었을 거다. 그렇게 와인을 잘 모르는 데면데면한 사이가 한동안 계속되다가, 유럽에서 여름을 보내는 동안 와인을 종종 입에 대게 되었다. 거기에서 마실 거라곤 콜라나 맥주 아니면 와인이었으니까. 18년의 여름, 나는 피크닉을 하겠답시고 와인을 마시다 갑작스런 소나기에 흠뻑 젖기도 하고, 주문 착오로 앞에 놓인 500ml의 샹그리아를 끌어안고 망연해 하기도 했다.
그런 일련의 사건이 있은 후엔 와인을 보면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와인은 일상이라기보단 유쾌한 기억과 얽혀 있었으니까 그랬다. 와인을 보면 좋은 기억이 떠오르고 그럼 내 기분도 좋아지고, 그런 긍정적인 연상작용이 계속되면서 와인에 대한 내 호감은 차차 높아져 갔다. 그러다 슬슬 와인의 맛이 익숙해질 때쯤 발견한 건데, 이게 또 은근 병나발을 불기에도 좋은 술이지 뭔가! (나는 병나발 부는 걸 좋아한다)
와인은 병이 크니까 오히려 병나발 불 기분이 난달까? 처음엔 무거우니 조심조심 나발을 불다가, 나중엔 신나게 병을 입에 가져다 대는 재미가 아주 끝내준다. 게다가 와인은 도수 역시 높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실컷 마시다가 남았거나 맛 없는 와인은 재료를 때려붓고 대충 끓이면 맛있는 뱅쇼로 변신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각종 치즈를 맛보는 것에 재미가 들려 홈파티를 벌이던 어느 연말 나는 와인을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예전엔 이게 무슨 맛인가 했던 다채로운 향과 깊은 맛이 이제는 좋다. 드라이나 탄닌을 강조한 것들은 취향에 안 맞지만, 어느 정도의 쌉쌀한 감각은 양해해줄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아직도 와인을 고르면 3번 중 한번은 실패하곤 하지만, 이건 잘못 고른 본인을 탓해야지 와인을 탓할 건 아니다.
무엇보다 와인의 가장 좋은 점은 굳이 잔에 따라마신다는 점이다. 종류 별로 잔의 모양을 달리하는 것도 그렇고, 와인잔은 유독 연약해서 잘 깨진다는 것도, 그 주제에 예쁜 굴곡을 지닌 것도 전부 귀중한 무엇을 대우해주는 경험과 관련된다. 형식을 따진다는 건 자신을 대접해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와인은 나를 귀하게 해주는 술이다. 그래서 잔을 맞부딪힐 때 느껴지는 손목의 리듬감이, 챙-하고 울리는 청아한 소리가 늘상 즐거운 것이다.
와인이 더 이상 귀한 술이 아니더라도 귀한 기분을 만들어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격식이 있어서 세련된 술, 하지만 충분히 친근하고, 술에 취하지 않더라도 다른 무엇에 취할 수 있는 술. 와인 한 잔을 곁들이는 삶을 많은 이들과 나누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