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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걍 Dec 09. 2020

고래

가끔씩은 인간이 패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압도적이다.


 만약 실제로 고래를 본다면 그 말밖엔 적을 것이 없지 않을까,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얼마 전 나는 고래에 대해 쓰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쓰려고 하니 나는 고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만이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엇도 쓸 수가 없었다. 모든 발상이 떠오르길 머뭇거렸다. 오로지 고래의 방대한 존재감만이 내 머릿속을 채운 채 물러나지 않았다. 그 아래에서 알량한 문장 몇 개를 꺼내보려 해도 힘없이 픽 사그라들었다. 고래에 대해 생각할수록, ‘고-래’, 그 거대한 이름만이 남았다.


 고래는 거대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그리고 거대함은 때때로 두려움을 준다. 한 번은 고래의 실제 크기를 보여준다던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본 적이 있었는데,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시꺼먼 것이 고래의 눈알이라는 걸 알고 소름이 돋아 그대로 컴퓨터를 꺼버렸던 기억이 난다. 지나치게 거대한 것은 늘 그렇다. 경외 속의 두려움을 선사한다.


 인간은 가늠될 수 없는 존재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고래는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지나친 거대함이어서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인간이 고래에게 그토록 잔혹하게 구는 이유를 얼핏 깨달았다. 미지를 두려워하는 인간이 두려움을 덮기 위해 택하는 방식이 크게 두 가지였기 때문이다. 신성시하거나, 폭력으로 굴복시키거나.


 고래를 신성시하는 방법은 차라리 나았다. 어쨌든 그 존재의 우위를 인정하고 숭배함으로써, '다루는 법'으로 신성을 내세워 접근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래에게 폭력을 가하는 방법은, 두려운 존재를 힘으로 억누름으로써 인간의 하위에 위치시키고 그 존재의 위상을 격하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고래는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고, 인간은 그렇게 고래를 극복해냈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인간일지라도 고래 앞에 서면 한없이 알량할 뿐인, 그의 존재감을 극복해내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고래야말로 인간의 열등감을 가장 부추기는 존재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니 인간이 이토록 고래에게 잔혹하게 구는 것일 테다. 인간이란 존재가 지닌 자기 종족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은 다른 자연 존재에 대한 열등감에서 기반하기 때문일 터다.


 그리스 신화에서 모든 생명체에게 신의 선물을 하나씩 주다 보니 인간에게는 줄 것이 없어 불을 주었다는 신화가 기억난다. 그렇듯 고도로 발달했다는 지능이 아니면 인간의 신체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니까. 인간이야말로 본인 존재의 아무 것 아님을 가장 알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인정을 하지 못해서 인간은 추해지곤 했다.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견딜 수 없어할 때, 어떻게든 우월하고자 아등바등 굴게 될 때 인간은 본질적으로 추해진다. 그래서 동물에게 가혹하게 구는 인간은 추하다. 또한 때로는 신성시조차 또 하나의 혐오가 되는데, 결국 그또한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되기 때문이다. 신성한 존재가 존재한다면 비천한 존재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니까, 그건 철저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궁극적으로 고래는 아무 것도 아니어야 했다. 고래 그 자체만이 고래에게 가장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신성시되지도, 격하되지도 않은 존재로서의 고래를 나는 보고 싶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고래를 보고 싶으면서도, 영영 고래를 보지 못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기도 했다. 어딘가에 존재는 하고 있으면서 만날 수는 없는 먼 이웃사촌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고래가 존재할 수는 없는 걸까.


 가끔씩은 인간이 패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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