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내게는 버릇이 하나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눈을 감고 걷는 거였다. 언제 무슨 이유로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차가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는 쭉 뻗은 도로를 걷다 보면 나는 눈을 감고 속으로 하나, 둘, 걸음 수를 세며 걷곤 했다.
시야가 차단되면 안전에 대한 불안이 증폭된다. 시각이 사라지면 방향을 잃은 감각들이 우왕좌왕 날뛰고, 눈으로 기억한 도로의 풍경이 전부 위협으로 변해 나를 두드려댄다. 바닥의 맨홀 뚜껑, 불룩 솟은 방지턱, 길가에 주차된 차, 우뚝 선 전봇대까지 거리를 가늠하는 사람의 상상력이 감각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분명 주변 사물까지 거리가 충분히 남았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는데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자꾸만 발이 멈칫거린다. 나는 똑바로만 걷고 있는데 자꾸만 발이 기우는 느낌이다. 어딘가에 부딪힐 것 같다는 불안이 머리를 핑 돌게 만들면 눈을 떠야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눈이 퍼뜩 떠진다. 그리고 안전하기 그지없는 주변과의 간격을 확인하면, 왜 더 걷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움과 동시에 사람이 얼마나 시각에 의존하고 있는지 깨달음의 연속이다.
종달리에서도 나는 무심코 눈을 감고 걷고 있었다. 광량이 풍부해서 거리가 노릇노릇한 색으로 물드는 오후였다. 풍부한 햇살 아래 눈을 감고 속으로 하나, 둘, 걸음 수를 세는데 문득 스무 걸음을 너무 쉽게 넘겼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눈을 퍼뜩 뜨고 잠시 놀라움을 즐겼다. 육지에서는, 눈을 감고 걷기 시작한 초반에는 열 걸음을 넘기는 것도 도전이었고 넓은 도로에서나 스무 걸음을 겨우 넘기고 뿌듯해하며 눈을 뜨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람이 살랑이는 종달리에서는 너무나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 둘 숫자가 올라가서 열 걸음을 넘기지 못한 적이 없었다. 여태 최고 기록이었던 서른 몇 걸음도 가뿐할 듯 했다.
문득 그 사실이 놀라워서 눈을 뜨니 주변 풍경이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내가 눈을 감아도 무서울 것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이, 그것을 내가 깨닫기보다 무의식이 먼저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 나는 놀라웠다. 고요히 똬리를 튼 평온의 힘이 느껴졌다. 안정됨은 기쁨으로 다가왔다.
평화로운 상태의 사람은 무서울 게 없나봐. 눈을 감고 걷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평화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나봐. 그러니 평화에 대한 믿음이 자라면 용기도 함께 자라난다는 그런 깨달음, 혹은 생각을 그때의 금빛 거리를 잊어버리기 전에 남겨두고 싶었다.
2019년 1월
제주도에서 스텝 생활을 했을 때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