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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Oct 12. 2020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아닌가!

2020년 8월 열이레의 단어들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은 자신의 친일과 배신에 따른 응징을 피하려고 이렇게 말했다.


몰랐으니까... 해방될 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안옥윤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나도 몰랐다. 코로나 때문에 발이 묶일지는. 10년도 더 전에 했던 금니가 벗겨진 것이 영 신경쓰여, 작년 10월 한국에 들어갔을 때 큰 마음 먹고 치과에 갔다. 아니 세상에 이런 겁쟁이가 다 있나! 싶은 사람이 바로 나다. 정말이지 용기가 필요했다. 치과에서는 이번에 왼쪽 금니를 새로 씌우고 다음에 오른쪽 금니를 새로 씌우자고 했다. 곧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는 일단 급한대로 이번에는 왼쪽만 하고 연말에 다시 한국에 들어오면 오른쪽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 두 달이 지나 다시 한국에 갔을 때, 어영부영 게으름을 피우면서 치과를 안 갔다. 다음 달에 한국출장이 있으니까 그때 가야겠다 했는데 코로나가 터지고 말았다. 정말 몰랐다.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될 줄 말이다. 


다행히 이가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치과에서는 금니가 벗겨져서 안에 이가 더 썩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동안 일을 더 키우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게으름에 대한 응징으로 겁쟁이는 반년을 걱정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치과에 가기로 했다. 안 그래도 무서운 병원인데 치과라니. 구글맵에서 사무실과 집 사이에 있는 치과를 찾아보고 얼마 전 스케일링을 받으러 치과에 다녀온 K의 추천을 받아 집 근처 아사히 치과에 가보기로 했다. 


오늘은 일단 예약만 하는 걸로 생각하고 일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치과에 들렀다. 앞에 두 손님이 있긴한데 혹시 오늘 진료를 받고 싶으면 말하라고 하길래 기다리겠다고 했다. 예약도 안 하고 왔는데 당일에 진료까지 받을 수 있다니 괜히 횡재한 기분이었다. 대기실 한 쪽에는 남자아이 혼자서 의젓하게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엄마는 형일지 동생일지 모를 아이를 데리고 진료실에 들어간 참이었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얼마 전에 죽은 이시하라 군단 배우의 젊었을 적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하와이에 별장을 사서 매년 여름 이시하라 군단 멤버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앞의 남자 아이 진료가 엄마와 함께 진료실에서 나왔고 잠시 뒤 내 이름이 불렸다. 


나는 긴장한 채로 슬리퍼를 벗고 의자에 앉아 먼저 입을 헹궜다. 곧이어 의사 선생님이 왔다. K는 의사 선생님이 엄청 친절하다고 얘기해줬는데 과연 그랬다. 문진표를 보고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 나긋나긋이 이야기해줬다.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기 위한 이야기도 오고갔다. 얼마 전에도 젊은 한국인 여자가 왔다갔다며, 아 이름이 뭐였더라 하더니 내가 K의 소개를 받아서 왔다고 쓴 문진표를 보고는 아 맞다 K! 하고는 K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하지만 K는 중국 사람이다.) 


본격적으로 진료가 시작되면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니 일단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먼저 치아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나를 배려해서 몸소 엑스레이 찍는 자세를 보여줬다. 엑스레이를 찍을 때 방사능에 노출되는데, 인체에 유해한 정도는 아니나 혹시 걱정되면 방호복?을 입어도 된다며 벽면에 걸린 방호복?을 보여줬다. 나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치아 사진도 찍었다. 이땐 천으로 눈을 가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진짜 카메라로 내 입을 찍는 듯했다. 그러고 나서 치아를 봐줬는데 이때 나는 실로 감동했다. 일본 치과가 모두 그런 것인지, 다른 의사선생님들도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꼼꼼히 살펴봐줬다. 스물 몇개인지 서른 개를 넘었을지 모를 내 치아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여가면서 먼저 앞면을 본 뒤, 그 다음으로 윗면, 마지막으로 뒷면을 봐줬다. 숫자가 오르락내리락 할 수록 내 신뢰와 믿음도 점점 더 전적이면서 무한한 것으로 거듭났다. 작년에 치과에 갔을 때는 시간=돈 이라는 철저한 경제적 철칙 아래 진료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마치 내 스스로가 근수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정육점 전자저울 위의 고깃덩어리마냥, 그저 금니, 1개, 00원으로 가격이 매겨진 환자1처럼 느껴졌지만 오늘은 달랐다. 사실 자본주의로 봐도 나는 손님이고, 인도주의로 봐도 나는 아픈 사람이니 의사 선생님의 진료는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런 꼼꼼한 진료는 처음이었다. 의사는 믿음을 주고 환자는 신뢰를 하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아닌가! 


진료가 끝나고 의사선생님은 내 치아 상태에 대해서 친절히 설명을 해줬다. 다행히 지금 당장 치료가 급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치료를 받아도 되고 한국에 돌아가서 받아도 된다고 했다. 치료를 받게 되면 뭘로 씌우는 것이 좋은지 물어봤다. 역시 금이 좋겠다고 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금니가 좋다고 했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반신반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금니로 결정하자마자 수간호사가 나를 따로 불러 아무도 없는 진료실로 데려가 흥정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의사 선생님이 금이 좋다고 한다면 금이 좋은 것이고, 은이 좋다고 하면 은이 좋은 것이다 하고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금값이 올랐다는데도 가격 또한 작년 코로나 이전에 금니를 했을 때와 비슷했다. 나는 조금 더 고민을 하겠다고 했다. 진료실을 나오니 여섯시가 훌쩍 넘었다. 나는 접수를 받는 간호사에게 나 때문에 퇴근이 늦어져서 미안하다고 했다. 진료비는 3천 엔이 조금 넘었는데 전혀 아깝지 않았다.


치과 : 歯科(しか)/ 참고로 사슴도 しか(鹿)/ はか라고 잘못 읽으면 무덤(墓)이 되니까 조심!
사랑니 : 親知らず(おやしらず)/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부모님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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