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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Nov 11. 2020

인왕상이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2020년 11월 이튿날의 단어들

유자를 안 딴다고 해서 늦잠을 잘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곱 시 반이 되니 저 멀리서 아침 먹자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비몽사몽 부엌으로 가서 할머니가 새벽부터 준비했을 밥과 반찬들을 쟁반에 담아 식탁으로 날랐다. 흰쌀밥에 된장국, 구운 생선, 어제 먹었던 단무지와 고로케, 계란말이, 어제랑은 맛이 다른 김. 고로케는 두 개밖에 없으니 빨리 먹는 사람이 임자라고 했지만 아침부터 밥이 거하게 들어가지 않아 욕심내지 않았다. 굳이 밖에 나가보지 않아도 어두컴컴한 하늘이며 똑똑 지면을 때리는 소리로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놀자며 피자를 만들어 먹자고 했다.


아침을 먹고 할머니가 장을 보러 나간다기에 YM이랑 같이 따라나섰다. 장보고 집에 돌아왔는데 소가 되어 있으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DG와 MH는 그새 곤히 잠들었다. 할머니는 차에 시동을 걸면서 본인을 폭주족이라고 소개했는데 과연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일단 엑셀부터 밟고 나서 안전벨트를 찾아 맸고, 우리가 전날 커브를 돌 때마다 조심조심 올라왔던 언덕길을 할머니는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망설임 없이 달려 내려갔다. 물론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차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운전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 옆을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먼저 빨래방에 들러 어제 하루 동안 나온 빨래거리를 세탁기에 쏟아 넣은 뒤 마트로 차를 몰았다. 할머니는 혹시라도 까먹을세라 장 볼 것을 종이에 적어왔고 YM은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할머니가 적어온 것들을 찾아왔다. 나는 그런 두 사람 뒤를 카트를 밀며 졸졸 따라다녔다. 장을 다 보고 빨래방에서 뽀송뽀송 잘 마른 빨래를 찾아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원래 무사고 장기운전자만 받을 수 있는 골드면허를 갖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태워줬다가 그 사람이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것이 경찰에 걸리는 바람에 벌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할머니는 안전벨트가 갑갑하다며, 언덕길에서는 경찰을 만날 리 없다며 안전벨트를 풀었는데 거짓말처럼 언덕길에 경찰차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절 입구에서 우락부락한 몸에 험상궂은 얼굴을 한 인왕상이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다행히 경찰은 순찰을 갔는지 차 안은 텅 비어있었다. 우리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언덕을 마저 내달렸다.


할머니가 아침에 만들어둔 피자 반죽을 밀대로 둥그렇게 편 뒤 토마토소스와 베이컨, 양파와 피망, 치즈를 얹어 화덕으로 옮겼다. 어제 유자 따기를 도와줬던 동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놀러 와서 같이 피자를 먹었다. 맥주, 양주, 일본술, 콜라.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든 마실 것에는 어제 딴 유자를 짜서 같이 마셨다. 대화는 주로 할아버지가 질문을 하면 우리들이 대답을 하는 식이었고, 내년에도 또 오라는 얘기를 중간중간 몇 번인가 했는데, 그 횟수를 더할수록 우리의 이번 만남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에게 얼마나 뜻깊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술도 마셨겠다 배불리 먹었겠다 잠이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불 속에 잠깐만 누워있는다는 것이 일어나니 5시였고 그 사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모두 집에 돌아가고 없었다.


먹고 바로 누운 탓인지 머리가 띵했다. YM은 체한 거라고 진단을 내려주고 체기를 내리는데 좋다는 엄지와 검지 사이의 혈을 있는 힘껏 눌러줬다. 신기하게도 체기가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두통을 다른 고통으로 대체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결 나아졌다. 모두들 빗속에 산책을 다녀오고서도 배가 꺼지지 않아 간단한 주전부리로 저녁을 대신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유자를 딴 날보다 유자를 따지 않은 날이 더 피곤했던지 어제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러 갔고, 우리는 또 어제처럼 고타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루를 넘겨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오사카부(府)를 도쿄처럼 도(都)로 만드는 것에 반대가 많았다.


早い者勝ち(はやいものがち):빠른 사람이 임자
買い物(かいもの):장, 장보다(買い物する かいものする)
胃(い)もた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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