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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Nov 10. 2020

죄책감을 마음 한 켠에 안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2020년 11월 하룻날의 단어들

아이고, 그동안 우리 할머니 농사일도 안 도와줬는데... 하는 죄책감을 마음 한 켠에 안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작년에 유자 따기 체험을 다녀온 MH가 올해는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간다기에 같이 가기로 했다. 4명이 함께 가기로 했는데 이번 유자 따기에 대한 정의는 4인 4색, 저마다 미묘하게 달랐다. 나는 여행 겸 체험 프로그램쯤으로 여겼는데, 만나서 이야기했던 것을 종합해보면 본격적인 농활부터 약간의 아르바이트 성격을 띠는 것까지 각자 다양하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모임을 기획한 MH조차도 이런 것이다! 하고 말을 하지 못해, 이거 잘못하면 유자까지 따놓고 숙박비 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아침이라곤 편의점에서 사먹은 고기만두가 전부여서 차가 꼬불꼬불 산길을 오를 때 약간 멀미를 느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하니 여러 채소를 듬뿍 넣은 밥에 달걀을 풀어넣은 배춧국, 고로케, 표고버섯치즈구이, 단무지, 시금치무침이 차려져 있었다. 이 나이 먹고도 반찬을 가리는 나는 초록색 시금치무침만 DG에게 주고 나머지 음식을 맛있게 먹었고,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젊은 할아버지가 물 대신 맥주를 권해 그것 또한 마다치 않고 홀짝홀짝 마셨다.


점심을 먹으면서 통과의례와 같은 몇 가지 질문을 받고 바로 집 아래 유자밭에 가서 유자를 따기 시작했다. 유자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동그란지 길쭉한지, 내 주먹보다 큰지 작은지, 열매는 땅에서 솟는지 하늘에서 열리는지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유자의 존재를 인식했던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유자로 만든 술을 마시거나 닭튀김이나 회에 딸려 나온 유자를 짜본 것이 전부였다.(사실 이마저도 레몬이 아니었나 하는 찝찝함이 남아있다.) 즉 유자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는 말이다.


유자의 첫인상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일단 샛노랗다. 바나나와 비교하자면 그 색채는 더 강렬하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순하다. 크기는 해가 잘 드는 곳에서 무럭무럭 자란 것은 귤보다 크지만 그늘 진 곳에서 자라거나 아직 다 여물지 못한 것은 귤만 하거나 그보다 작다. 유자를 딸 때는 가위로 꼭지를 잘라야 한다. 손 닿는 곳에 유자가 있다고 해서 손으로 따면 꼭지가 뜯겨나가 속살이 훤히 보여 상품으로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자나무는 유자 열매를 지키기 위해 온 나무에 가시를 세우고 있기 때문에 다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먼저 가위로 가지채 자른 다음에 유자 꼭지를 잘라내는 것이 좋다. 가지를 싹둑 자른다고 해서 내가 생각한 대로 유자가 바로 톡 하고 떨어지지는 않는다. 가지채 떨어지다가 가시와 가시가 엉켜 더 견고하게 나무에 매달리기도 하고 가시에 유자가 꽂히기도 한다. 그러면 유자가 상처 입은 곳에서는 은은하게 유자향이 새어 나오는데, 향이라는 것은 분명 무색의 것일 텐데 향을 맡고 있자면 꼭 눈 앞에 샛노란 향기 덩어리가 둥실둥실 떠다니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다행히 유자 따기는 힘들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말고도 할머니의 이웃주민들, 친구와 그 친구, 아들과 손자들이 함께 일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금방 목표량을 채울 수 있었다. 사실 유자를 따는 사람은 목표량이 얼마인지, 앞으로 얼마나 더 유자를 따야 하는지 모른 체 그저 유자를 딴다. 오로지 유자를 트럭에 싣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그 날 유자 따기의 진행 상황을 알 수 있는데, 해가 미처 지기 전에 오늘 목표량을 채웠다는 승전보가 전해졌다. 유자나무들도 인해전술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출하를 마치고 나니 사위가 온통 어둠에 잠겼다. 바로 앞에서 얘기를 해도 얼굴은 안 보이고 목소리만 들렸다. 작은 트럭을 타고 잠깐만 긴장을 늦추면 곧바로 뒤로 밀리는 언덕길을 올랐다. 산 맞은편에서는 이지러지기 시작한 달이 같이 떠올랐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산길을 헤매다가 겨우 집에 돌아갔다. 식탁에서는 벌써 샤브샤브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할머니는 한국김이 맛있다지만은 일본에도 맛있는 김이 있다며 김 한 통을 꺼내 줬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래 봤자 일본 김이지 하고 얕봤는데 참기름을 발라 약한 불에 살짝 구워 소금간을 한 한국김이랑은 맛이 또 다른 별미였다. 엄청 맛있다고, 집에 갈 때 사가야겠다고 하니 어깨가 으쓱해진 할머니는 김 한 통씩을 선물로 챙겨줬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고타쓰 안에 들어가 내일은 비가 온다는데 무얼 할까 얘기하는데 어느덧 시곗바늘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안녕 유자



柚子(ゆず):유자
第一印象(だいいちいんしょう):첫인상
上り坂・登り坂(のぼりざか):언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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