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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Nov 12. 2020

할머니는 소녀처럼 울먹였다.

2020년 11월 사흘날의 단어들

어제 장을 보면서 할머니가 내일 아침은 뭘 해주면 좋을지 고민하길래 간장계란밥도 괜찮아요! 했는데 진짜 아침 식사로 간장계란밥을 준비해줬다. 아니 할머니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밥 차려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도 모자랄 판에 뭣이 어쩌고 어째?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굳이 글로 적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시골짝까지 와서 일을 도와주는데 겨우 간장계란밥? 이라는 불평불만이 아니라, 내가 농담처럼 가볍게 말한 것을 할머니가 진지하게 들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라우면서 왠지 모르게 죄송스러웠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유자를 따고자 서둘러 양치만 하고 집 위의 밭으로 갔다. 어제 비가 내려서 땅이 질퍽한 곳이 있을지 모른다며 할머니는 고무장화를 챙겨줬다. 분명 어제 하루 쉬었는데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에 뻐근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았고, 반나절 한 것도 경험이라고 그새 요령을 터득해서 처음보다 좀 더 빠르고 능숙하게 유자를 땄다.


할머니의 집은, 할머니 말에 따르면 옷 한 벌만 챙겨 가 목수 밑에서 기술을 배우며 사업을 일군 오빠가 지었다고 한다. 집이 비게 되자 할머니가 대신 들어와 살면서 유자 농사와 민박을 같이 하고 있는데 가끔 오빠가 놀러 오곤 한단다. 언덕에 일군 유자밭 한쪽에는 유자나무가 아닌 나무 두 그루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고 있다. 손재주 좋은 오빠는 두 나무를 기둥 삼아 그네를 만들었다. 어제는 집 아래 유자밭에서 그네를 올려다보기만 했는데 오늘은 집 위의 유자를 따기로 했으니,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듯 우리도 한 번씩 그네에 올라봤다. 안 그래도 그네 줄이 길어 하늘 높이 올라가는데, 언덕에다 그네를 만들어 놓아 발 밑이 아득하다. 이곳에 그네를 매달 생각을 했다는 것이 낭만적이다.


점심으로는 할머니가 찐 떡과 손수 만든 어묵, 그리고 내가 만들 줄도 모르면서 먹자고 한 부침개를 먹었다. 전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계절이 되면 편의점에서 파는 고기만두랑 어묵을 사 먹는 게 소소한 행복이라고 하니, 할머니는 그거 하나도 맛이 없다며 직접 만든 어묵을 끓여줬다. 부침개는 DG가 얇으면서도 바삭바삭하게 구워줬는데 모두들 감탄을 마지않았다. 마지막 식사에도 맥주가 빠지지 않았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출발하기 전까지, MH는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도 그냥 놀리지 않고 유자를 따고 담고 나르기를 반복했다. 물론 YM도 DG도 나도 손을 거들었지만 MH만은 못 했던 것 같다. 그 순수함은 의외의 모습이었다.


엊그제 풀었던 짐을 다시 싸고 집에 돌아가 준비를 했다. 할머니가 유자랑 쌀을 챙겨줘서 올 때보다도 오히려 짐이 늘었다. 짐을 바리바리 차에 싣고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사진을 찍으러 모두 유자를 따고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모두들 투박한 손으로 손가락 하트를 하고 기무치-를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이제 진짜 돌아갈 시간이 되자 할머니는 고맙다며 눈물을 보였다. 나는 시간이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을 더 단단하고 무딘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소녀처럼 울먹였다. YM도 덩달아 눈이 벌게졌고 나도 곧 눈물이 쏟아지고 엉엉 울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으며 유자밭을 내려왔다. 이젠 어디서 유자를 만나게 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발걸음이 머물게 될 것 같다.

그네를 타면 저 앞산까지 다 내 것이 되는 것 같다.


卵(たまご)かけごはん:간장계란밥(일본에서는 한국과 달리 쌀밥 위에 날계란을 얹은 뒤 간장을 뿌려 먹는다)
ブランコ:그네
もらい泣き(なき):남이 우는 것을 보고 덩달아 같이 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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