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생각해보니 굳이 안 그랬어도 됐을 것 같지만, 오늘 저녁은 면으로 하자고 했다. 치과 치료 때문에 한쪽으로만 조심해서 씹어야 하다 보니 국물 따라 술술 넘어가는 면이 좋을 것 같았다. 몇 가지 면 요리와 면과 상관없이 추천받은 요리 가운데 한 곳을 MR이 낙점하였고, 각자 퇴근하는 대로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셔츠옷깃과 소매 전용 세제가 있어 요긴했는데, 한국에서는 어째 비슷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런 건 다이소에 가면 있을 거라던 MR의 말이 떠올라 둘을 기다리는 동안 다이소를 구경했다. 마침 일본에서 쓰던 것과 기능, 모양, 가격이 비슷한 것이 눈에 띄어 냉큼 집어 들었다. 점원들은 교대하려고 정산을 하는지 무인 계산대를 이용해야 했다. 기계가 익숙하지 않은 듯한 아저씨가 이거 왜 안 되냐며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무얼 샀는지 모르겠지만 직원은 성인 인증이 필요한 물건이라 그렇다며 설명하면서 도와주었다. 화면을 유심히 읽어보았으면 혼자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궁금했다.
1번 출구를 찾지 못한 둘을 마중 갔다. 둘 다 제법 겨울 옷차림이어서 내가 철 따라 옷을 입지 못하고 있나 싶기도 했는데, 아침 지하철을 생각하면 딱이었다. 목도리만 하나 챙겨야지 싶었다.
가게를 지나쳤나 싶을 때 가게로 들어가는 골목이 나왔다. 다행히 대기줄은 없었지만 셋이 앉으려면 조금 기다려야 할 듯했다. 친절한 직원은 먼저 앉은 손님에게 자리를 옮겨줄 수 있는지 물어 우리 자리를 만들어줬다. 남자는 그러겠다는 눈치였는데 여자는 영 싫은 티를 내는지라 괜히 직원에게 미안했다.
사장님일지 주방장일지 아니면 그 둘을 겸하고 있을지, 일본에서 조리전문학교를 졸업했다는 졸업증이 벽면 한쪽을 차지했고 그 옆에는 우동학교 수료증이 있었다. 혹시 가가와 우동체험을 걸어놓은 것은 아니겠지? 미쉐린에도 소개된 가게란다. 전에는 모르고 먹고서도 맛있었는데 오늘은 알고 먹으니 더 맛있을 것 같았다.
전에는 기본 메뉴를 시키고 오늘은 기본 메뉴의 매운맛을 시켰는데, 이게 딱이다. 앞으로 이 메뉴 고정이다. 두 선배도 나쁘지 않게 먹은 모양이다. 둘은 이렇게 진한 맛이 나는 걸 보면 닭 말고도 돼지로도 육수를 낸 것이 아니냐며 의견을 나눴는데, 나는 국물 맛을 보고 그것이 닭인지 돼지인지 소인지 맞힌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쨌든 맛있었으니 됐다.
MR이 안국역 근처 유명한 빵집을 소개해줬다. 저번에 지나가다 장사진을 쳤길래 도대체 무슨 가게인가 싶었는데 빵집이었다니. 낮에 손님이 미어터질 때는 공장에서 만든 빵을 다마스 차에 실어와 조달한단다. 오늘은 빵이 다 팔렸다고 해서 가게만 눈에 익혀두고 카페로 갔다. GB는 눈에 바로 띄는 스타벅스에 갈까 했지만 MR은 여기까지 와서 무슨 스타벅스를 가냐며 나혼자산다에 나왔다는 카페로 우리를 이끌었다. MR은 가는 길에도 김광규가 무슨 과일청 탄산음료를 시켜놓고는 젓지 않고 마시는 바람에 위에 있는 500원어치 탄산만 마셨다며 웃었다. 실내는 어디고 자리가 모호해서 바깥에서 마시기로 했다. 사무실에서 챙겨 온 경제신문을 꺼내 보며 우리만 덕을 보지 못한 주식이며 부동산을 두고 곡소리를 냈다.
카페가 생각보다 일찍 영업을 마감하는 바람에 거리로 나서 광화문까지 걸었다가 교보문고에 들어갔다. GB는 끌리는 책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어느 것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이젠 어디 가서 취미가 독서라고 하면 거짓말을 했다고 잡혀갈지도 모른다. 책 표지는 전에 없이 현란하고 아기자기했지만 그 내용이 뻔해 보인다. 참고로 오늘 가장 내 눈길을 끈 책은 다름 아니라 컬러링북이었다.
광화문에서 GB를 배웅했다. 나는 그저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경기도 버스는 번호마다 줄을 서야 한단다. 다행히 버스에 자리는 넉넉했고 우리는 버스가, 정확히는 버스 앞자리에 앉은 GB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준 뒤 우리 버스를 타러 갔다. 다음에는 조금 더 일찍 만나 인왕산도 올라보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