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The Ending Credit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영화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삶은 행복할까?
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글·사진 감성현
#기억_01
길고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기분입니다.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았던 커다란 날개를 가진 여인의 모습이 이제야 완성되었습니다.
얼굴은 그녀의 얼굴입니다. 그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드디어 완성했네. 천사.”
“악마일 수도 있지. 보는 관점에 따라서, 믿는 관점에 따라서.”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찬찬히 바라봅니다.
하얀 날개와 검은 날개를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믿는 관점에 따라서,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건 이제 그 그림을 바라보는 이의 몫입니다.
유리 외벽을 통해 바라본 하늘엔 오랜만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잔뜩 습기를 머금은 공기의 중후한 무게가 느껴집니다.
여인의 자궁 속에 안긴 것처럼 포근하고 아늑합니다.
이럴 땐, 커피가 제격입니다.
그런데 이런, 커피가 떨어지고 없습니다.
책상 위에 놓아둔 차 키를 챙기자 한 걸음 다가온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봅니다.
“비도 많이 오는데, 어디 가게?”
“커피 떨어졌어. 커피 사 올게”
“그냥 다른 거 마시자.”
“아니야. 이런 날씨엔 커피가 딱 이야. 걱정하지 말고. 물이나 올려놔.”
“사고 안 나게 조심히 운전해.”
걱정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길을 나섭니다.
차를 몰고 좁은 골목을 빠져나올 무렵, 빗줄기가 더욱 굵어집니다.
마치 열대기후의 폭우 같습니다.
엄지손가락만 한 빗줄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 지붕을 두들깁니다.
아무래도 빨리 다녀와야겠습니다.
심해지면 더 심해졌지, 수그러들 빗줄기는 아닙니다.
거칠고 빠르게 차를 몹니다.
다행히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저 사거리만 지나면 됩니다.
신호가 바뀌려고 합니다.
그냥 기다리지 말고 갈까? 잠시 고민해봅니다.
그래, 가자.
살짝 신호를 무시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립니다.
굵은 빗줄기가 시야를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빗줄기 사이로,
커다란 트럭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입니다.
빗길에 미끄러지는 듯 심하게 이리저리 휘청대고 있습니다.
끝내 중심을 잃고 옆으로 넘어집니다.
흠뻑 젖어 있는 도로인데도 불꽃이 일어납니다.
길을 건너던 사람들의 얼굴에 비명이 어립니다.
그 비명 소리가 닫힌 차창을 뚫고 들려오는 듯 합니다.
겁에 질려 다리가 굳은 사람들을 그대로 트럭이 밀어 버립니다.
여기저기 사방으로 피가 튀어 오릅니다.
그 끔찍한 모습을 고스란히 감싸 안은 채 트럭은
곧장 내게로 오고 있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그렇게,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갑자기 찾아옵니다.
당겨진 활시위가 놓인 것처럼 순식간에 덮쳐옵니다.
쾅!
강한 충격이 온 몸을 뒤 흔듭니다.
의식이 멀어집니다.
미세한 이명이 귓가에 울립니다.
그리고 곧 세상이 모든 소리가 사라집니다.
여전히 빗줄기는 멈추지 않습니다.
#기억_02
결혼식입니다.
검은 턱시도를 입고 있습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립니다.
돌아본 사회자 석엔 감독이 서 있습니다.
신부를 소개하며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킵니다.
그곳에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수줍게 고개를 숙인 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습니다.
눈이 부십니다.
눈부신 신부입니다.
그녀는,
나의 아내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상하게 눈물이 흐릅니다.
행복한 눈물이 흐릅니다.
모든 게 꿈만 같습니다.
꿈이라면,
이대로 영원히 깨지 않고 싶습니다.
#기억_03
“깨, 깨어났다! 깨어났어!”
감독의 목소리입니다.
몹시 흥분해 있는 것 같습니다.
목소리를 듣는데도, 눈은 잘 떠지지 않습니다.
온몸이 무겁습니다.
심하게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사고라도 났었나?
무언가 떠오르려 하다가도,
그 무언가는 잡을 수 없는 연기처럼 이내 사라집니다.
“일어났어요?”
이번에 다른 목소리입니다.
깨어났다는 감독의 목소리를 듣고 서둘러 달려온 듯합니다.
그 목소리가 내 손을 잡아줍니다.
가녀린 손입니다.
따뜻한 손입니다.
사랑스러운 손입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눈을 떠봅니다.
조금씩 밝은 빛이 들어옵니다.
그녀가 보입니다.
눈가엔 눈물이 잔뜩 고여 있습니다.
왜 울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슬퍼서 그러는 건 아닌 듯합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바라본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습니다.
“괜찮아요? 저 알아 보겠어요? 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녀가 날 아저씨라 부릅니다.
아저씨?
아저씨!
순간,
날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며 두 눈을 더욱 크게 떠봅니다.
그녀의 뒤로 온통 하얀 벽입니다.
그제야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느껴집니다.
“아저씨, 저에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그녀가 아닙니다.
여우입니다.
충분히 알아봅니다.
하지만 난,
지금 그녀를 찾고 있습니다.
나의 아내가 된 그녀를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병원에 있는 이상,
적어도 내 아내에게는 연락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아내에게는 연락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무척이나 걱정하면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가야 합니다.
서둘러 가야 합니다.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간힘을 쓰는 내 마음과 달리
내 팔과 다리는 좀처럼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갑자기 왜 그래? 진정해!”
감독이 화들짝 놀라며 버둥거리는 날 붙잡습니다.
“가야 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누가? 누가 기다린다는 거야?”
“내 아내!”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칩니다.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내를 걱정하는 감정이 분노로 변질되어 쏟아져 나옵니다.
“아내라니?”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서 감독이 되묻습니다.
“내 아내 말이야! 사회를 봐놓고도 몰라?!"
"사회? 그건 무슨 소리야?"
"알잖아! 알고 있잖아! 다 알고 있잖아! 다들 알고 있잖아!”
하지만 감독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입니다.
그 침묵이 천천히 내 목을 조여옵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숨을 쉴 수 없습니다.
머리가 아픕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왜 저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억_04
“진료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계속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계시더군요. 물론, 담당하시는 의사 분과도 이미 통화를 했어요. 자신의 병을 단순히 불면증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이신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불면증이 아닙니다. 의학용어로 정확하게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라고 합니다. 사람의 뇌가 말입니다,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충격을 받으면,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스스로 지워버리기도합니다. 뇌의 해리라는 장치가 그 역할을 하죠. 망가져가는 스스로를 스스로가 지키기 위한 방어 본능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 이 환자분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망상 속에서 사랑을 하는 ‘드 크레람볼트 증후군(De Clerambault’s Syndrome)’도 함께 겪고 있다고 담당 의사는 소견을 내더군요.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기억을 연출해 나가는 것이요. 해리를 통해 새하얗게 리셋된 기억 속에서 말이죠.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증상은 말이에요, 감성이 극도로 예민한 사람일수록 더 쉽게 휩싸이게 됩니다. 작가들에게서 종종 나타나곤 하는 정신 질환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작가시라고요.”
뭐라는 건지.
지금 도대체 뭐라는 건지.
“정리를 하자면. 지금 환자분 같은 경우에는 우연한 교통 사고로 인해, 정말 우연히도 그 망상 속에서 빠져나온 겁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충격은 없을 테니까요. 충격으로 조작된 기억이, 더 큰 충격으로 인해 재정리 되었다고 할까요? 물론, 사람의 뇌라는 게, 그리고 기억이라는 게 이렇게 단순하게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만,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설명해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신적으로 아픔이 있다는 걸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백프로 회복할 수 있어요...... 이제 그만,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만해.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스토리디렉터 감성현의 신작 | <19 씩씩하게 아픈 열아홉>
육체적 고통을 통한 정신적 성장을 다룬 이야기.
"어른도 아니도 아닌, 열아홉.
달리기를 좋아하던 난,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다."
기억할게.
내 첫 기억.
내 기억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