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07상상

After The Ending Credit

by 감성현

After The Ending Credit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영화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삶은 행복할까?

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글·사진 감성현







#상상_01


잠든 그녀가 좀처럼 깨어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아 입술이 바짝 마릅니다.


벌써 몇 번이나 그녀의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숨결을 확인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고,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잠들었던 그녀가 일어납니다.


입이 마르는지 물을 달라고 합니다.

허둥지둥 컵에 물을 따라 가져갑니다.


“먹여줘.”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을 잡고 일으키려는데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이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해를 못 하고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앙증맞은 입술을 내밀고 오물거립니다.

아! 알았습니다.

물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고 그녀에게 입을 맞춥니다.


“맛있다.”

그녀가 웃습니다. 그 모습이 또 예쁩니다.


“나 머리 간지러워.”

물 한 모금에 없던 기운이 다시 생기나 봅니다.

머리를 감기기 위해 그녀를 안고 휠체어에 앉힙니다.


아, 너무 가볍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보다 가볍습니다.

참, 속상합니다.


“앞으로, 잘 먹어야겠다. 너무 가벼워.”

“머리 감고 밥 먹을게. 나 맛있는 거 사줘. 병원 밥 맛없어.”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을 합니다.

아이처럼 좋아라 합니다.


세면대에 휠체어를 세웁니다.

행여 미끄러질까,

꼼꼼하게 바퀴도 고정하고,

천천히 머리를 뒤로 젖힙니다.


샴푸로 거품을 냅니다.

싱그러운 샴푸 향이 금세 기분을 상쾌하게 만듭니다.

그녀도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잔뜩 미소를 머금고 눈을 감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물로 헹굽니다.


“물, 차갑지 않지?”

“좋아.”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허전해지는 기분입니다.


손가락 사이로 한 움큼 머리카락이 힘없이 빠져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덤덤히 그녀가 묻습니다.


“머리카락, 많이 빠지지?”

“응…… 조금.”

“말하는 게 어찌 믿음이 안 가는 데?”

“아니야. 정말 조금이야. 괜찮아. 예뻐.”

“언제 예쁘냐고 물어봤어? 거짓말인 거 목소리만 들어도 다 알아.”

모른 체 수건을 가져와 머리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아냅니다.


“자기야. 어지러워.”

“어지러워? 누울까?”

“아니, 자기 때문에 어지러운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세게 하면 머리가 울려서, 어지러워.”

살살했는데, 정말 살살했는데, 그것조차 힘든 모양입니다.


“놀랐어? 장난이었는데?”

“장난치지 마. 재미없어.”

평소라면 짓궂다며 볼이라도 힘껏 꼬집어 줬을 텐데 그만 얼굴이 굳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장난이었다는 말과 다르게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봤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말없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냅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아까보다 한참을 더 조심스럽게 닦아내는데도,

두 눈을 질끈 감고 아픔을 참아냅니다.

이번에는 내가 미안해할까 봐 어지럽다는 말도 안 합니다.

그 상황에서도 머리카락은 계속해서 한 움큼씩 엉키며 빠집니다.

너무도 쉽게,

너무도 많이 빠져서 겁이 납니다.


“있잖아, 자기야. 나, 아무래도 머리 밀어야 할까 봐.”

그렇게 말하곤, 그녀가 날 바라봅니다.

날 바라보는 얼굴엔 미소가 어려있습니다.


내 평생 다시는 보지 않길 바라는

가장 슬픈 미소입니다.






#상상_02


면도칼을 들고 있는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가녀린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집니다.


툭.

툭.


조금씩,

아주 조금씩 천천히 자릅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라도 멈추고 예쁘게 마무리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하자고 하면 좋겠는데,

눈을 감고 빙그레 웃고만 있습니다.

아니, 입은 웃고 있는데,

눈엔 눈물이 고입니다.


툭.

툭.


그녀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상상_03


탐스럽게 익은 딸기 한 봉지를 들고 병원으로 돌아옵니다.

좀처럼 밥을 잘 못 먹는데, 분명 딸기를 먹으면 입맛이 돌아올 것입니다.

다행히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일가게가 있었습니다.

딸기를 구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나 왔어!”

병실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순간 화들짝 놀란 그녀가 그대로 얼어붙습니다.


한 손엔 손거울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에 립스틱을 들고 있습니다.

이미 입술에 반쯤 묻어 있습니다.


“미, 미안.”

순간, 알몸이라도 본 것 같은 미안함이 밀려와, 재빨리 병실 문을 닫습니다.

그러자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안절부절 못하는 목소리가 닫힌 문 뒤에서 조그맣게 들려옵니다.


“어떡해. 아, 진짜, 왜 지금 들어오냐고. 어머, 삐뚤어졌잖아. 내가 못 살아 정말……”

아마도, 예쁘게 보이고 싶었나 봅니다.

나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나 봅니다.


잊고 있었습니다.

다 잊고 있었습니다.

내 앞에서 한없이, 여자이고 싶은, 그녀입니다.


앞으로는 환자가 아닌, 여자로 바라보기로 마음 먹습니다.

여전히 내겐, 아름다운 그녀입니다.






#상상_04


퇴원하기로 했습니다.

환자가 아닌 여자로 곁에 두고 싶습니다.

그녀가 바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의사와 상담 후,

퇴원 수속을 밟고 병실로 돌아오니

그녀의 병실 안에는 형사가 와 있습니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문 뒤로 몸을 숨깁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많이 좋아졌네. 그 사람 때문인가.”

“그 사람이 잘해줘. 같이 있으면 즐겁고.”

“처음부터 그 사람에게 보냈어야 하는데, 내가 괜한 욕심을 부렸나 봐…… 미안해.”

“아니야, 우리, 미안해하지 말자.”

“이제 우리, 다시 볼 수 없겠지?”

“아마도……”

“아파서 빈틈이 조금은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하네. 언제나 너만 생각하는 건. 하긴, 그러는 편이 나도 마음 정리하기 쉽고 좋지. 그럼, 쉬어.”

“저기……”

“왜? 더 할 말 있어?”

“고마워.”

“뭐가?”

“그 사람에게, 연락해줘서.”

“...... 그래.”

대답하는 형사에게서 씁쓸함이 느껴집니다.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정성을 다해 보살펴주고 사랑해주었는데,

정작 고마워하는 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상황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감정입니다.


씁쓸히 병실을 나오는 형사가 문 뒤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잠시 눈이 마주칩니다.

아무런 말없이 서로 쳐다봅니다.

침묵이 흐르다가,

형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척 스쳐갑니다.


잠시 시간 두고,

병실에 들어서자,

그녀가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날 반겨줍니다.


"자기야, 왜 이제와. 보고 싶었어."

이런, 그녀가

조금은 밉습니다.






#상상_05


퇴원하고 돌아온 그녀는 감회가 새롭나 봅니다.

서재를 두리번거리며 한참이나 회상에 잠기는 듯합니다.

그러다 유리 외벽에 시선이 멈춥니다.

미완성의 그림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대로 놔둔 거야? 지우지 그랬어. 없애던지. 내가 밉지도 않았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대로 있는 그림에 기분이 좋은지,

그녀가 내 손을 포개어 잡고 따뜻하게 날 바라봅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눈 눈빛은

며칠이 걸려도 다 말할 수 없는 많은 대화입니다.


완성하고 싶어.

이 그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마른 입술에 입을 맞춥니다.

입맞춤을 나누는 동안 그녀는 날 침대로 이끕니다.


아직은 성한 몸이 아니면서, 애써 무리합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눈동자에 눈물이 고입니다.


“이제, 나…… 안고 싶지 않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얼마나 사랑하는데.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말도 안 됩니다.


아니라고 말해도 그녀는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굳게 다문 입술로 눈물을 참아내려 애씁니다.

그 눈물에 수차례 입을 맞추며 내 마음을 전해보지만,

좀처럼 그녀는 밝게 웃어주지 않습니다.


“미안해…… 이렇게 망가진 몸으로 돌아와서.”

짧게 말하더니,

자기가 내뱉은 그 말에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오는지,

금세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아.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망가진 몸이라니.

그렇게 생각할리가 없는데도,

그녀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입술을 깨뭅니다.

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꽉 깨뭅니다.

저러다 정말 피가 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녀답게 그렇게 눈물을 참아냅니다.


“사랑해.”

아니라는 대답을 대신하는 짧은 한 마디.

그리고 깊은 입맞춤.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깁니다.


손가락만 한 길이의 흉터가 이젠 사라져버린 가슴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흉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그곳에 입을 맞췄을 때,

그녀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아기처럼 내게 달려들어 안깁니다.


점점 아기가 되나 봅니다.

사랑스러운 울보 아기입니다.







스토리디렉터 감성현의 신작 | <19 씩씩하게 아픈 열아홉>

육체적 고통을 통한 정신적 성장을 다룬 이야기.


"어른도 아니도 아닌, 열아홉.

달리기를 좋아하던 난,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다."


기억할게.

내 첫 기억.

내 기억 끝까지.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6371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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