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The Ending Credit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영화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삶은 행복할까?
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글·사진 감성현
# 재회_01
누군가 문을 요란하게 두들깁니다.
당연히, 여우겠지 싶어서 문을 열어주는데, 말끔하게 차려입은 낯선 남자입니다.
어디서 봤는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처음 뵙겠답니다.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누구십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내 이름을 먼저 확인합니다.
내 이름이 맞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분명히 날 찾아온 사람입니다.
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름이 뭐였지?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서운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이대로 이름 없이 사는 것도 좋겠다 생각합니다.
세상에 내가 드러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 남자를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르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상당히 긴장됩니다.
“저는……”
남자는 자신을 남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말을 듣고는 잠시 혼란에 빠집니다.
그녀입니다.
그녀의 흔적을,
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듯합니다.
머릿속이 멍해집니다.
그대로 얼어붙어 버립니다.
눈동자만 겨우,
간신히 돌려 남자를 바라봅니다.
“무슨 일이죠?”
“그 사람이…… 스스로를 죽여가고 있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어둡습니다.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하는데 매정하게도 굳게 다문 입술은 사실이라고 확인시켜 주는 듯합니다.
그녀의 남편이라고 말하는 남자가,
그녀와 헤어진 지 한참 뒤에서야 찾아와,
그녀가 그녀를 죽여가고 있다고 합니다.
분명,
안 좋은 일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합니다.
나쁜 년.
건강하게 잘 살지.
행복하게 잘 살고나 있지.
그녀가 끝까지 날 아프게 합니다.
#재회_02
병원으로 향합니다.
급하게 차를 몰면서도 남자는 애써 침착하려 합니다.
짧게 악수까지 건넵니다.
남자는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합니다.
날 찾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형사라는 직권이 없었다면 끝끝내 찾을 수 없었을 거라고 합니다.
공권력을 이렇게 맘대로 이용해도 되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습니다.
아무 말도 하기 싫습니다.
그가 싫습니다.
꼴 보기도 싫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뭘 어떻게 했길래, 그녀가 죽어갑니까!
“아내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는데, 처음엔 그림을 그리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며칠씩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그 말을 믿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직업이 무섭다고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는 확신이 들더군요. 그래도 참았습니다. 형사라는 직업이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많고, 외로워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다 내 탓이려니, 그래서 더 잘해주자고 다짐했는데, 이상하죠. 그러면 그럴수록 더 싸우게 되니까 말입니다. 언젠가는 사랑하긴 하냐고 물어봤죠.”
그 남자, 사랑해?
아니, 사랑은 아니야, 아직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사랑한 적 없다고 하더군요. 미안해하지도 않더군요. 사랑해 보려고 했었다고. 그건 진심이라고 하면서요. 오히려 그 말이 그렇게 아프더군요.”
사랑도 없이 무슨 결혼을 한다고 그래?
없어도 할 수 있어, 결혼.
“그리고 이혼을 했습니다. 아내는 이혼하고, 당신에게 가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무렵, 자신의 몸이 심각하다는 걸 알았죠. 암이었습니다. 가슴과 자궁에. 그전까지는 아내도 나도, 몰랐습니다.”
비 오던 그날.
무언가 숨기듯 집에 가겠다고 했던 일,
그 후로 한동안 연락되지 않았던 일.
차갑게 돌아서 놓고, 억지로 이별을 참아내던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게 맞아떨어집니다.
헤어지는 그날,
한참 만에 입을 연 그녀의 첫마디가 왜 미안이었는지.
결혼한다는 말.
어쩌면 결혼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말해줬다면 그날 카페에서 붙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까, 이미 마음을 확인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말했나 봅니다.
떠나겠다는 말이 아닌,
나에게 떠나라고 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녀는 어떤가요?”
그녀가 몹시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가슴과 자궁을 적출해야 했습니다.”
“적, 적출이요? 도려냈다고요?”
“선택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죽었을 겁니다. 겨우 살아났죠.”
머릿속이 멍해집니다.
잘못 들었겠지 했는데,
형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운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구토가 밀려옵니다.
겨우 참아내고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십니다.
“여자로서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는지, 그 후로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서서히 스스로를 죽여가고 있습니다. 그대로 둘 수는 없었습니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아내와 날, 이렇게 만든 당신인데도 말입니다.”
분노를 삼키는 형사의 턱 위로 근육이 솟아오릅니다.
그렇게 대화가 끊겼습니다.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차가 미끄러지듯 낯선 병원에 도착합니다.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 체 스스로를 죽여가고 있는
그녀가, 저곳에 있습니다.
내 평생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가, 저곳에 있습니다.
#재회_03
손이 떨려 병실 문고리조차 잡을 수 없습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침대에 누워 죽은 듯이 잠든 그녀가 보입니다.
무척 말라 있습니다.
새까맣게 변해있는 얼굴에,
커다란 두 눈은 움푹 들어가 있고,
입술은 생기를 잃고 심하게 말라 있습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꾹꾹 참으니, 눈물은 긴 한숨이 되어 흘러나옵니다.
울 순 없습니다.
아픈 그녀를 앞에 두고,
울면 안 됩니다.
그녀가 눈을 뜹니다.
힘없이 뜬 눈이 병실을 한 번 두리번거리더니 날 발견하고 멈춥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게 손을 뻗습니다.
“자기야. 오늘도 왔네……”
오늘도 왔다고 합니다.
매일 내가 찾아오는 꿈을 꿨던 모양입니다.
날 그리워했나 봅니다.
바보같이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이제서야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원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잔인하게 잊겠다는 다짐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아픈데,
짐이 될까 봐 숨어버린 것뿐인데.
바보같이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녀의 거칠어진 손이 내 볼을 어루만집니다.
그러다 곧, 흠칫 놀랍니다.
눈동자가 커집니다.
믿을 수 없는 듯, 제대로 확인하고 싶은지 몇 번이나 껌벅거립니다.
다시 한 번 만져보더니,
갑자기 온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합니다.
곧바로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댑니다.
내게서 멀어지려 합니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지,
힘에 겨워 숨까지 몰아쉬면서도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버둥칩니다.
“이 사람, 누가 불렀어? 왜 불렀냐고! 가라고 해! 빨리!”
“안 가. 안 갈 거야. 그러니까 진정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 노려봅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온 힘을 다해 쥐어짜듯 소리칩니다.
그 모습이 안쓰럽고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러다 피를 토하고 쓰러져 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더는 참지 못하고 와락 그녀를 끌어안습니다.
너무 말라 있습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만 같습니다.
“이거 안 놔?! 가라고. 꺼지라고.”
밀어냅니다.
날 밀어냅니다.
힘으로 안 되자 내 어깨를 온 힘을 다해 깨뭅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지금의 아픔은 오히려 그녀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 역시 고맙습니다.
“그만…… 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은 부드러워진 목소립니다.
진정된 듯합니다.
조금씩 내가 알던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놓치지 않습니다.
두 번 다시 놓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까 가. 자기야, 가줘, 자기야…….”
자기라고 합니다.
자기라고 불러줍니다.
정말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밤마다 혼자 베개를 껴안고 나 혼자 불러보기도 했던 말입니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 날 그녀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내 얼굴을 어루만집니다.
내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줍니다.
왜 울어……
그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그녀의 손이 차갑습니다.
내 눈물이 뜨겁습니다.
#재회_04
몇 시야?
새벽 네 시.
안 피곤해?
괜찮아.
안 졸려?
안 졸려.
나 보고 싶었어?
응.
얼마나?
많이.
나 밉지.
응.
이제 어떡해?
뭘 어떡해?
가라고 해도 안가고, 힘없어서 도망도 못 가겠고.
그냥 있어.
왜 왔어…… 그냥 잊고 살지.
그러게…… 내가 왜 왔을까?
자기야.
응?
자기야.
왜?
나, 아직도 사랑해?
사랑해.
왜 사랑해?
너니까.
스토리디렉터 감성현의 신작 | <19 씩씩하게 아픈 열아홉>
육체적 고통을 통한 정신적 성장을 다룬 이야기.
"어른도 아니도 아닌, 열아홉.
달리기를 좋아하던 난,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다."
기억할게.
내 첫 기억.
내 기억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