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05습관

After The Ending Credit

by 감성현

After The Ending Credit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영화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삶은 행복할까?

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글·사진 감성현







# 습관_01


“무슨 약을 습관처럼 먹냐? 이게 그 약이야?”

감독이 불러 편집실에 왔습니다.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야 하는 약이라, 편집실에서 먹었더니,

지켜보던 감독이 들고 있던 약통을 빼앗아 들고 앞뒤로 돌려 보며 묻습니다.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보다 직접적인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해 줍니다.


“병명은 뭐래?”

“스트레스성 불면증.”

거짓말입니다.

다른 병명이었지만,

이름이 길고 낯설어서 말해줘도 모르고,

또 설명하기도 귀찮습니다.


“지금까지 촬영한 거, 가편집한 거야.”

감독은 구석에 놓여있던 의자를 당겨와 내 앞에 내놓습니다.

그동안 촬영했던 장면들 중에서 많은 장면들이 편집되어 빠져있습니다.

내 머릿속 기억들도 저렇게 지우고 싶은 부분은 모두 편집해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시간이 흐르고 담담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고 있으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현장에서 여우의 연기를 보던 것과는 다릅니다.

화면을 통해 보는 장면들은 실제 내 머릿속 기억 그대로입니다.


그날 이후,

미묘하게 변한 여우의 대사 속,

말투까지 그녀와 똑같아져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우가 그녀인지,

그녀가 여우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아."

참지 못한 외마디 비명인 입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왜? 아파? 약 먹어."

"아니야, 그런거."

걱정하는 감독의 눈빛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화면 속 그녀, 아니 여우를 봅니다.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기분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참아가며 봅니다.

어차피 이겨내고 지워내야 합니다.


“말은 안 했지만, 너 참 잔인한 구석이 있어. 어떤 기분이야, 자신의 기억을 이렇게 화면을 통해 눈으로 보는 기분이?”

내 살의 일부를 칼로 도려내 버리는 기분.

감독이 화면을 멈추고, 편집실의 불을 켭니다.

예상했던 대답과 달랐는지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더 이상은 내색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예술 하는 녀석들은 죄다 정상은 아닌 것 같아. 그지?”

대답 대신, 침묵으로 답을 합니다.


애써 아닌 척하고 있습니다.

애써 담담한 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견딜 수 없습니다.

참 잔인한 일을 스스로에게 해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녀와의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내 삶에서 떨어져 나가길 원한 사람입니다.


잔인하게 떠났으니,

잔인하게 잊어주겠습니다.






# 습관_02


편집실을 나와 단골 바에 들립니다.

모처럼 나온 김에 녀석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연락을 받고 찾아온 녀석이 손을 흔들며 들어옵니다.


가슴골이 반쯤 보이는 깊게 파인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습니다.

그런 녀석의 뒤로 수많은 남자들이 시선이 따라옵니다.

녀석이 내 옆에 앉자 여기저기서 안타까워하는 탄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인기 좋네. 괜찮으면 여기 있는 사람 중 하나 골라 봐. 밀어줄게.”

“임자 있는 몸이 그러면 안 되지.”

녀석이 해맑게 웃습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머뭇거리자 녀석이 왼손을 들어 내 앞에 내밉니다.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습니다.


아! 몰랐습니다.

녀석이 연애를 합니다.


“헤어지지 않았어?”

“누구? 아, 예전에 그 사람? 그 사람이랑 헤어지고 만난 사람이야.”

그 말에, 그녀가 떠오릅니다.

그녀도 나와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 남자, 사랑해?

아니, 사랑은 아니야, 아직은.


사랑도 없이 무슨 결혼을 한다고 그래?!

없어도 할 수 있어, 결혼.


그게 말이 돼?

말이 돼, 충분히!


“말이 돼지. 결혼과 사랑은 별개잖아. 결혼은 현실이라고.”

이젠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서 살고 싶다고.

그래서 결혼한다고 합니다.


남자는 잘생겼다고 합니다.

지적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섹시하다는 말을 할 때는, 녀석이 얼굴까지 붉힙니다.


들어보니 녀석의 피앙새는,

집안도 좋고, 직업도 좋습니다.

무엇보다 취미가 같아서 함께 있는 시간이 무척 즐겁다고 합니다.

좀 전에도 함께 공연을 보고 작은 하우스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녀석의 얼굴에선 밝고 예쁜 미소가 내내 떠날 줄 모릅니다.


“참, 좋은 사람이야. 나한테도 잘하고……그런데…”

그런데,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대로 이렇게 결혼해도 되는 걸까? 후회하면 어떡하지?”

“지금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지.”

“영화가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은 행복할까?”

녀석의 얼굴에 잠깐, 걱정의 표정이 흐릅니다.

하지만, 그 표정마저도 미소가 섞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앞두고 한 번씩은 하는 고민입니다.


“원 녀석도.”

습관처럼 튀어나온 말에 녀석이 웃습니다.

그 웃음이 너무 순수하고 예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일곱 살 때로 돌아간 듯합니다.


“날, 녀석이라고 불러주는 네가 몹시 그리울 거야.”

잠시 추억에 잠기더니,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고개를 들고 내 손을 잡습니다.


“너, 내 짐 하나만 들어줘라.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이젠 내려놓을래.”

그러면서 잡고 있던 내 손을 당겨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습니다.

잠시 마른 침을 삼키더니,

준비된 듯 마음속에 담고 있던 짐을 내려놓습니다.


“나, 너 사랑했다.”

순간, 정적이 흐릅니다.

무슨 상황인가 한참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다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녀석이 민망해하면서도 기분 좋게 따라 웃습니다.


“진심이야.”

“그래, 알았어.”

“부담 안 돼? 난 그동안 마음 좀 앓았는데…… 아무리 내가 여자로 안 보인다고 해도……”

“보여. 여자로…… 그것도 너무 예쁜 여자로, 보여. 너. 충분히. 그래서 너랑 같이 다녔던 거야. 너처럼 예쁜 여자가 곁에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거든. 게다가 성격 좋지. 마음도 잘 맞지.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니?”

내 대답에 녀석은 적잖게 당황하는 듯합니다.

얼굴이 붉어지고, 황급히 고개를 떨굽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날 노려봅니다.


“너! 지금 장난치는 거지? 깜박하고 당할 뻔했네.”

“아니, 진짠데.”

“근데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 수 있어? 말과 표정이 일치가 안 되잖아.”

“했다며.”

“응?”

“아까, ‘사랑했다’고 했잖아. 지난 일인데 부담될 게 뭐가 있어. 다 그렇게 묻어버리는 거지. 그거면 말 다한 거 아닌가?”

“하여튼 누가 작가 아니랄까 봐……이 상황에서도 과거형, 현재형 구분하고 있었냐?”

핀잔을 줍니다.

그래도 마음은 편해진 모양입니다.

다시, 평소의 녀석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지 못했던 짐 하날 내려놓습니다.


다행입니다.

오랫동안 무거워했을 짐 하날 덜어 줄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의 수다가 반가웠는지,

앞으론 자주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선지 좀처럼 헤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한참을 그곳에서 더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보니 자정이 훌쩍 넘어,

어느새 밤도 새벽도 아닌 시간이 됩니다.


지금의 녀석과 나처럼.


그제야 일어납니다.

가져온 차를 운전하고 가겠다고 합니다.

조금이었지만,

그래도 나눠 마신 술이 있었기에 차 키를 빼앗습니다.


“택시 타고 가.”

“안돼. 나 아침에 차 쓸 일 있어. 빨리 차 키 줘.”

“그럼 대리 불러.”

“집이 코 앞인데 번거로워.”

녀석이 지지 않습니다.


“그럼, 자고 아침에 가.”

그 말에 정적이 흐릅니다.

녀석이 날 빤히 쳐다봅니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면.

우정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남녀 간의 우정은 있겠지만,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녀석과는,

여기까지 인지도 모릅니다.

이대로 묻어둬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녀석이 웃습니다.

웃음은 전염돼, 나도 따라 웃습니다.

어둠이 내린 도시 한복판에서 우리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

잠시 후, 택시 한 대가 섰을 때,

갑자기 녀석이 두 팔로 내 목을 감싸며 아주 오랫동안 부드럽게 입을 맞춥니다.


다정합니다.

따뜻하고, 다정합니다.


녀석이 조금씩 웃는 게 보입니다.

너무도 유쾌하게 웃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나 봅니다.


녀석은 내가 열어주는 뒷문으로 택시에 올라탑니다.

내가 흔드는 손을 바라보며 택시가 조금씩 도시의 어둠 속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그렇게 녀석이 돌아갑니다.


그렇게 녀석을 돌려보냅니다.

녀석과는, 아직까지 인지도 모릅니다.






# 습관_03


책상 앞에 앉아 나머지 시나리오를 쓰고 있습니다.

인물들의 대화를 직접 소리 내어 읽어봅니다.


때론 여자가 되었다가,

다시 남자가 됩니다.

감독이 되기도 하고,

여우가 되기도 하고,

그녀가 되기도 합니다.


그때, 누군가 문을 요란하게 두들깁니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아마도 감독이 보낸 자료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별생각 없이 문부터 엽니다.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입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내가 못마땅하고 서운한지,

고개를 살짝 돌리고 흘겨 봅니다.


“아저씨. 들어오란 말도 안 해요?”

아저씨라는 말이 낯섭니다.


여우입니다.

그제야 그녀의 환영에서 벗어나 여우가 눈에 들어옵니다.

실망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이 희미하게 흘러나옵니다.


“들, 들어와.”

“누구 있어요? 밖에 서 들었는데, 여러 사람이 있던 것 같던데. 여자 목소리도 들렸던 것 같고.”

“아니야, 시나리오 쓰고 있었어.”

“시나리오? 아…… 작가들도 배우처럼 연기해 보며 쓰는구나.”

그러면서 구석구석을 마치 제집처럼 편하게 돌아다닙니다.


“혼자 사는 남자치고는 말끔하네요.”

칭찬인지 빈정대는지 구별이 되지 않는 말투입니다.


“이게 그 그림이군요.”

유리 외벽 앞에서 걸음을 멈춰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립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살짝 입술을 내밉니다.


“선과 악인가? 좌우가 다르네…… 이 그림. 미완성이죠?”

“그래.”

아저씨가 그리는 거예요? 물감이 아직 안 마른 거 같네……

사실, 벗어 놓은 옷들과 쌓아둔 설거지에 신경 쓰느라 여우가 한 말을 잘 듣고 있지 않습니다.

여우는 한참을 더 유리 외벽 앞에 서서 찬찬히 그림을 감상합니다.

충분히 봤는지 발걸음을 옮깁니다.


“아까부터 왜 자꾸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왜 그렇게 민감해요? 어디 여자라도 숨겨 놓으셨나? 여긴 사방이 탁 트여서 뭔가 숨겨 놓을만한 장소도 없구먼…… 이 마룻바닥을 뜯으면 또 모를까.”

“정신 사나우니까 어디 한 곳에 진득하니 앉아 있으란 말이잖아.”

무슨 호기심이 그렇게 많은지,

내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다 이젠, 허락 없이 책상 서랍까지 열어봅니다.


“이 언니군요. 내가 연기하는 실재 인물.”

깊숙이 묻어 두었던 그녀의 사진입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라도 연듯합니다.


“정말이네. 닮았다. 나랑. 지금 어디 있어요? 이 언니?”

“결혼했어.”

“아, 맞다. 내가 연기해놓고 물어보네.”

미안한지 살짝 혀를 내밉니다.


“그런데 아직도 언니 사진을 갖고 있네요?”

여우의 물음이.

여우의 관심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있습니다.


왜 왔는지 모르지만, 그만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지,

내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그저, 천진난만하게 호기심 가득한 얼굴입니다.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냥, 내다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뒀을 뿐입니다.


그뿐입니다.






# 습관_04


여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옵니다.

왜 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어보면 ‘그냥’이랍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고 하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촬영 없어? 무슨 여주인공이 이리 한가해?”

“그건 제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무슨 여주인공 분량이 그렇게 없어요? 카페에서 헤어지고는 그 언니는 아예 안 나오던데요. 아무튼, 그래서 한동안은 촬영이 없어요.”

“귀찮아서라도 분량 만들어줘야겠네.”

여우가 실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하게 웃습니다.


그리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가져온 책을 꺼내 읽습니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을 가져와 읽던지,

날 앉혀놓고 연기 연습을 하기도 합니다.


때론 장을 봐와서 요리를 한다고 설쳐댑니다.

가끔 늦은 외출 후, 돌아오면

현관 가득히 ‘어디 갔어요? 미워요!”라는 식의 메모를 잔뜩 붙여두는 항의를 합니다.

어차피 약속하고 오는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그런 날이면 전화라도 하지,

왜 왔나 싶다가도,

왜 그냥 갔나 싶어집니다.






# 습관_05


이젠,

여우가 찾아오면 습관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커피를 내립니다.


커피는 정성입니다.

단 한잔을 내리더라도 조급해해선 안 됩니다.

답답하다고 한꺼번에 한가득 물을 부어 내리면,

커피의 진정한 맛이 우러나지 않습니다.


여우는 그런 커피 같습니다.

그래서 여우가 오면 언제나 커피를 내립니다.


“내가 내려주는 커피를 올 때마다 마실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자기야?”

“네? 뭐요? 지금…… 누굴 부른 거에요? 저 부른 거 맞아요?”

여우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봅니다.

아, 습관처럼 그녀를 불렀나 봅니다.


“미안…… 습관이 돼서. 입에 붙어서 그래.”

“거 참, 지독한 습관이네.”

여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시선을 돌립니다.


“나 배고파요. 라면 삶아 주세요.”

“밤늦게 무슨 라면이야?”

“밤늦게 커피는 괜찮고요?”

“커피랑 라면이랑 같아? 배우가 자기 관리도 못 하고 살찌면 어쩌려고.”

“아! 몰라요. 몰라. 아저씨가 삶아준 라면 먹고 싶단 말이에요.”

“귀찮아. 알아서 삶아 먹던지.”

“좀 해주면 안 되나?”

“그동안 내가 삶아준 라면이 몇 박스는 될 거다. 누가 들으면 생전 라면 하나 안 삶아준 줄 알겠네.”

“내가 삶으면 맛이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내가 삶으면 아저씨도 와서 먹잖아요!”

막무가내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라면을 입에 달고 삶아 달라 노래를 부릅니다.

정신 사납습니다.

결국, 라면을 삶아 대령합니다.


"근데요…… 왜 나한테 사귀자는 말 안 해요?"

갑작스러운 여우의 물음에,

같이 앉아 먹던 라면이 다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요즘 애들은 당돌하다고 하더니,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감을 못 잡겠습니다.


"사귈 마음이 없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돌려 말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몇 번이나 되물을테니.


"남자란 관심 없는 여자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아요."

"내가 언제 친절을 베풀었다고 그래?"

“언제든지 찾아와도 반겨주고, 향 좋은 커피도 내려주고, 이렇게 맛있는 라면도 삶아주고.”

“그건 네가 하도 떼를 쓰니까 그런 거잖아. 이런 건 오누이 사이에도 충분히 하는 거야.”

“요즘 남녀 사이에, 오누이는 무슨.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너, 정말!”

정말로 당돌합니다.

먹던 라면이 얹힐 것 같습니다.


"외롭지 않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돌립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전의는 상실되고,

물어본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외롭지 않아.”

“에이. 지금은 그렇게 말하죠. 하지만 나중엔……”

"나중에도 외롭지 않아. 평생, 내 옆에 아무도 없다 해도 괜찮아."

"네? 왜요?"

여우는 정말 놀란 듯합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입니다.


충분히 했으니까.

사랑은 이미 그녀와,

후회 없이 충분히 했으니까.


여우와 장난처럼 주고받은 대화였지만,

분명, 고백이었고.

분명, 거절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젠 여우와의 관계가 어색해질 것 같습니다.


“아저씨! 앞으로 어색해질 것 같다는 생각 했죠?”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여우가 묻습니다.

정곡을 찔려 화들짝 놀라자,

어처구니없다며 혀를 찹니다.


“이럴 줄 알았어. 하여튼! 아저씨들은 안 된다니까. 그냥, 제 감정을 솔직하고 말하고 싶었어요. 저를 사랑해 달라는 부탁도 아니고, 저에 대해서 생각해 봐 달라는 말도 아니고요. 사실, 대답을 기대하긴 했지만, 이젠 됐어요. 괜찮아요. 그리고 저, 하나도 안 민망하거든요! 좋은 사람 만나면 정도 들고, 그러다 보면 고백도 하고 그러는 거지. 안 그래요? 하여튼 촌스럽게……”

여우는 고개를 묻고, 라면이 담긴 그릇을 앞으로 바싹 당기고, 씩씩하게 먹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라면이 참 많이 불어 있습니다.


여우도,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살짝 내 눈치를 봅니다.


“아저씨, 그런 성격이구나? 버림받는 게 싫어서 시작도 못 하는 소심한 성격…… 아무튼. 힘들게 고백한 건데, 본전도 못 찾았네…… 아저씨. 그렇게 추억 속에서 갇혀 살면 안 돼요. 간직하고 있는 추억을 버려야 새로운 추억도 생기죠.”

지금은 한 발짝 물러서려는 술수가 보입니다.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기로 합니다.


여우의 말대로 그녀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워낼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한 상처를 주기 전에 끝내야지, 끝내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약해집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참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여우가 싫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찾아오지 않는 날이면, 허전한 기분마저 듭니다.

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주는 여우가 곁에 있어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괜찮아. 앞으로도 찾아와.


여우가 하얀 치아를 들어내며 배시시 웃습니다.








스토리디렉터 감성현의 신작 | <19 씩씩하게 아픈 열아홉>

육체적 고통을 통한 정신적 성장을 다룬 이야기.


"어른도 아니도 아닌, 열아홉.

달리기를 좋아하던 난,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다."


기억할게.

내 첫 기억.

내 기억 끝까지.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6371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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