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04현실

After The Ending Credit

by 감성현

After The Ending Credit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영화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삶은 행복할까?

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글·사진 감성현







# 현실_01


문에 걸어둔 작은 종을 울리며 카페 안으로 그녀가 들어옵니다.

말없이 내 앞에 앉습니다.

긴 침묵이 흐릅니다.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립니다.

카페 안에 나지막이 흐르는 이름 모를 노래만이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미안.”

한참 만에 입을 연 그녀의 첫마디는 미안입니다.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잊으라고 합니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하는 건지.

말이 된다고는 생각하는 건지.


작가는 난데,

어설프게 뭘 생각해 왔는지.


차라리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차가운 말투로 담담하게 남처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러다 그냥 농담이라고.

장난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죽을 만큼 아프니까,

충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까,

더 이상은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일어납니다.

끝끝내 눈도 마주치지 않고서,

그녀가 일어납니다.


차가운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친 악몽입니다.

깨어나고 싶습니다.


끝.


끝?


아니, 그럴 순 없습니다.

끝낼 수 없습니다.

못합니다.

못하겠습니다.

못해먹겠습니다.


달려가 그녀를 붙잡습니다.

잡은 손을 뿌리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걸음을 멈춥니다.

사실이라면 묻고 싶습니다.

사실이라면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 남자, 사랑해?"

"아니, 사랑은 아니야, 아직은."


"사랑도 없이 무슨 결혼을 한다고 그래?!"
"없어도 할 수 있어, 결혼."


"그게 말이 돼?"

"말이 돼, 충분히."


그녀가 나지막히 말을 이어갑니다.

아니, 말을 끝맺습니다.


"충분히 했으니까.

사랑은 이미 자기랑,

후회 없이 충분히 했으니까."


그녀의 눈을 보는 게 아니었습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 없어도 돼.

상관 없어."


그녀가 마지막 말을 내뱉고,

영영 입을 다뭅니다.


그녀는 견뎌내고 있습니다.

여리고 작은 어깨를 바르르 떨면서 참아내고 있습니다.


아픈가 봅니다.

나 못지않게, 그녀도 아픈가 봅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미련이 남은 내 손안에서 그녀가 빠져나갑니다.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더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습니다.

더는, 빠져나가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내 곁을 떠났습니다.






# 현실_02


“컷!”

카페 안에 『감독』의 한마디가 울려 퍼집니다.

순간 숨죽이며 배우들의 연기를 보던 모든 스태프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감독 옆에 놓인 시나리오는,

카페에서의 이별 장면에 맞춰서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는 촬영장입니다.

오늘의 여기까지 오기까지 많은 날들이 내 곁을 흘렀습니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난 후, 내 삶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광기에 사로잡혀 그녀와의 단상들을 벽 하나에 가득 써내려 갔습니다.

어떻게 살아냈는지도 모를 그런 하루가, 결국 한 달이 되고, 그 한 달이 모여 다시 한 해를 넘어갈 무렵,

이미 몸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온몸에 기운이 쏙 빠지고, 자꾸만 잠이 밀려왔습니다.


그때 솔직히 기뻤습니다.

영원히 잠들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죽어가던 날 발견한 것이 친구인 감독입니다.

도통 연락이 되지 않자, 걱정된다며 찾아왔었습니다.


그 후로 며칠 밤낮으로 함께 지내며 기운을 북돋아 주고, 다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삶의 끈을 놓아버린 내가 안쓰러웠는지, 벽 하나를 가득 채운 단상들로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든 자기가 영화로 만들겠다며 말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 뒤,

고작해야 시나리오의 앞부분만 정리했을 뿐인데,

촬영을 강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배우와 스태프들을 모으고,

촬영장비를 빌리고,

촬영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가만히 누워만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판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감독이 내게 말해줍니다.

하루라도 더 지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자극을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감독의 바람대로 내겐 적잖은 충격이었고,

새까맣게 굳어있던 피가 다시 붉게 불타오르며 온몸을 휘감고 뛰어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잊고 있던,

글에 대한 즐거움을 되찾는 순간,

밤새도록 책상 앞에 앉아 그녀와의 기억들을 시나리오에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감독은 날마다 아침이면,

지난밤에 추가로 정리한 부분에 대해서 물어옵니다.

거기에 맞춰서 그날 촬영할 장면을 수정하거나,

즉석에서 의견을 내놓기도 합니다.


내가 촬영장에 자주 오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즉석에서 감독과 정리해 나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가 현실이고, 현실이 영화인 사람들입니다.

그들 속에 지금, 내가 있습니다.






# 현실_03


“컷! 아니야. 아니라고!”

감독이 속상한 듯, 자신도 모르게 점점 언성이 높아집니다.

그 중압감에 『여우』가 잔뜩 어깨를 움츠립니다.

‘그녀’ 역을 맡은 신인배우입니다.


처음, 오디션에서 여우를 만났을 때,

너무나도 그녀와 닮은 외모에 마치 그녀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아서,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러니, 감독님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모니터 옆에 서 있던 매니저가 살갑게 웃으며 감독에게 말을 붙입니다.

감독은 그런 매니저를 퉁명스럽게 대합니다.


“지금 뭡니까? 너그러이?”

“네? 저…… 그냥, 다름이 아니라……”

“당신, 이 상황이 우스워?”

“네? 무슨 말씀을 그렇게...."

"내가 괜찮다고 하면, 저 아이 연기가 나아진 거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이 참. 감독님 말씀 이상하게 하시네."

"그럼요?"

"그냥, 감독님이 내 배우 때문에 많이 속상해하시는 것 같으니까 제가 더 미안해져서 그러는 거지요.”

“뭐요? 내? 지금 내, 배우라고 했어요? 그럼, 지금 난, 저 애를 내,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아, 아까부터 왜 자꾸 그렇게 받아들이세요. 그런 게 아니라요, 우리 애가 그래도 열심히는 하니까……”

“열심히? 열심히요? 여기에 지금, 그 열심히를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감독님! 제 말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열심히든 말든, 프로면 됩니다. 내가 요구하는 연기를 정확히 표현해 낼 수 있는 프로 말입니다!”

한껏 쏘아붙이는 감독의 독설에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잔뜩 몸을 움츠립니다.

순식간에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습니다.


감독이 내뱉은 날카로운 독설을 무서워하면서도,

여우는 이 모든 상황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어렵게 용기를 내, 말을 꺼냅니다.


“못하니까, 열심히, 하겠다는 거예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립니다.

지켜보는 다른 사람이 더 안타까워합니다.


"뭐, 인마!?"

감독이 버럭 소리칩니다.

순간 움츠러든 여우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칩니다.

"못하니까, 그러니까.... 열심히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그거라도 안 하면, 안 하면....”

말을 끝내지 못하는 여우를 감독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엽니다.


“입은 살아서…… 대들 깡 있으면 연기에나 집중해.”

감독은 다시 모니터 앞에 앉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조감독이 다시 촬영을 준비합니다.


“다시 갑니다. 자, 조용!”

멈춰있던 카메라가 다시 돌아가지만 좀처럼 여우는 촬영에 쉽게 몰입하지 못합니다.

감정을 추스르려 하는데 잘 되지 않아 어쩔 줄 몰라합니다.

상반신만 확대해서 촬영하는 장면이라 그 표정이 고스란히 모니터를 통해 전해집니다.


“참말로 정말, 가지가지한다. 저래서 무슨 연기를 하겠다고....”

감독이 또다시 촬영을 멈춥니다.

여우는 울음을 쏟아 낼 것 같으면서도 꾹꾹 눌러가며 참아냅니다.


배우란 그런가 봅니다.

울고 싶지 않아도 연기 때문에 울어야 하고,

정작 울고 싶은 때는 연기 때문에 울지도 못하는.

그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잠시 쉬었다 가죠.”

결국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갑니다.

그 뒤로 아까 그 매니저가 쪼르르 따라갑니다.

아무래도 곧바로 다시 촬영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여우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라는 말만을 반복합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오히려 미안해집니다.


“감독이 유별나서 그런 거야.”

“왜 잘하는 애를 윽박질러서 울리고 그래? 난 좋기만 하던데.”

모두들 다독입니다.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에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여우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참아내려 바둥거립니다.

차라리 펑펑 울어버리는 게 더 좋겠는데,

아마도 스스로 울지 않으려 다짐한 모양입니다.


“안 되겠다. 어디 가서 진정 좀 하고 와요.”

조연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우는 도망치듯 촬영장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그런 여우의 모습이 걱정스러워 따라가 봅니다.


아무래도 '그녀'를 닮은 탓인지, 자꾸만 곁을 맴돌게 됩니다.


여우는 유난히 어두운 외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손수건을 꺼내 건네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듭니다.


"닦아요."

시원하게 울어버리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또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감.... 사합니다...."

그러고 있는 사이, 전화가 울립니다. 조연출입니다.


“작가님! 지금 같이 있으시죠?”

조연출은 내가 여우와 같이 있는 걸 알고 있나 봅니다.

통화를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손을 흔들고 있는 조감독이 보입니다.


“다름이 아니고요. 감독님이 중요한 장면인데 아무래도 오늘 감정이 안 나올 것 같다고, 다음 장면을 먼저 촬영하자고 하세요. 다음 장소 아시죠? 좀 먼데……”

“알아. 거기로 이동하면 되나?”

“거기로 바로 오시면 되는데요, 오실 때 같이 좀 와주셨으면 해서요.”

“매니저는?”

“감독님 기분 풀어 준다고 같이 먼저 가셨어요. 대신 저에게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제가 사실 지금, 급하게 바뀐 촬영 때문에 이것저것 급하게 챙겨놔야 할 게 많아서요…… 누굴 챙길 여력이 안돼서요.... 부탁 좀 드려도 되죠?”

“알았어. 내가 같이 갈게…… 그래, 이따 봐.”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어서 그런지,

여우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날 따라와 차에 올라탑니다.

여우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무거워 있습니다.


“걱정돼?”

“네……”

“촬영 순서가 갑자기 바뀌어서?"

"네.... 괜히 저 때문에 다들...."

"이게 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원래 그런 거야. 상황에 따라 나중에 촬영하기로 한 걸 먼저 촬영하기도 하고, 먼저 촬영하기로 한 걸 나중에 촬영하기도 하고.”

운전을 하며 곁눈으로 쳐다본 여우는,

신발을 벗고 다리를 끌어올려 의자 위에 놓고는,

무릎 사이로 턱을 괸 채 두 눈을 부릅뜨고 한 곳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억지로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말리고 있습니다.

견뎌내고 있습니다.

여리고 작은 어깨를 바르르 떨면서 참아내고 있습니다.


헤어지던 날.

카페에서 붙잡았던 그녀의 어깨처럼.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날, 결국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정하게 품에 감싸 안고,

차라리 실컷 울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속 안에 모든 걸 다 털어내게 해주고 싶습니다.

조금의 미안함도 갖지 않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음악을 켭니다.

볼륨을 최대한 높입니다.

옆에서 뭐라고 해도 들리지 않을 만큼 볼륨을 높이자,

여우가 놀랐는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봅니다.


"가끔은, 우는 것도 좋아."

그 시선을 모른 척,

차창 밖으로 나 역시 고개를 돌리고 흘러가는 풍경을 감상합니다.


어느새 비가 내립니다.

맑은 하늘에 잠깐 내리는 여우비입니다.


커다란 음악 속에 숨어 여우가 웁니다.

아이처럼 큰소리로 목놓아 웁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습니다.


여우비 내리는 하늘이 참 싱그럽습니다.


그녀가 웁니다.

이제야.






# 현실_04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다시 하늘이 맑게 개어 있습니다.

여우도 덩달아 해맑게 웃고 있습니다.

다시 기운이 나는지, 발랄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입가에 미소를 보니 그녀가 떠오릅니다.

정말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럼 이게 실화에요?”

조금은 친해진 여우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여우가 작품에 숨은 뒷이야기를 궁금해 합니다.


실화.

글쎄.


아닐지도 모릅니다.

작가는 현실을 취해서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도 모르는 게 다듬고 지어낸 부분이 있을 겁니다.


“믿고 싶은 쪽으로 생각해.”

모호한 대답이었는지,

여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바라보고 있습니다.


"실화 같은데요?"

"그래, 그럼 실화라고 해."

"흐음."

“왜? 왜 그런 얼굴로 봐? 실망했어? 실화 속 작가가, 그 남자배우처럼 잘 생기지 않아서?”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여우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입니다.


그 옆 모습이 더욱 그녀와 닮았습니다.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있는 듯합니다.


“저기, 말투 말이야. 조금 더 담담하고 뭐랄까…… 건조하게 해볼래? 할 수 있니?”

“네? 말투요? 아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렇게요?”

아. 정말 닮았습니다.

단번에 목소리까지 그녀와 닮아 버립니다.


“그 언니 말투가 이랬어요?”

“응.”

“그렇구나…… ‘자기야. 안녕. 나 이제 돌아왔어.’ 어때요? 비슷해요?”

여우가 그녀의 말투를 연기합니다.

여우가 그녀의 모습을 연기합니다.


묘한 기분이 듭니다.

애써 깊숙이 묻어 두었는데.

이제는 더는 마음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모든 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기분입니다.


자기야. 안녕.

나 이제 돌아왔어.








스토리디렉터 감성현의 신작 | <19 씩씩하게 아픈 열아홉>

육체적 고통을 통한 정신적 성장을 다룬 이야기.


"어른도 아니도 아닌, 열아홉.

달리기를 좋아하던 난,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다."


기억할게.

내 첫 기억.

내 기억 끝까지.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6371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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