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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n 30. 2021

도마뱀과의 동침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마닐라 #도마뱀 #동남아




내 방엔 도마뱀이 산다.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도마뱀에 대한 내 생각은 확실하게 바뀌었다. 

도마뱀은 참 아름다운 동물로 기억된다. 


도마뱀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도 떠오른다. 

꼬리에 못이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의 곁을, 

몇 년째 먹이를 물어다 주며 지켜준 또 다른 도마뱀의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도마뱀을 좋아했던 건 아니다. 

내 방 안을 돌아다니는 손가락만 한 크기의 도마뱀과 처음 마주쳤을 땐 

기겁하고 비명을 질러댈 수밖에 없었다.


스파이더맨도 아닌 것이 놀랍게도 벽을 타고 돌아다닌다. 

그래서 때때론 침대에 누우면 천장에 매달려 있는 도마뱀을 발견하기도 한다. 

자다가 내 얼굴 위로 떨어지거나 입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처음엔 도마뱀을 보는 족족 쫓아 버렸다.

 

“어? 도마뱀 좋은 건데? 모기 잡아먹어 주잖아요.”

테미가 정색을 하며 앞으로 도마뱀을 보면 자기를 부르라고 했다. 

잡아다가 자기 방에 놓고 기르겠다며.


'응? 모기를 잡아먹어? 아! 그렇단 말이지?'

필리핀에는 모기가 참 많다. 

게다가 ‘전투모기’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방독면이라도 착용했는지 모기향 속에서 유유히 날아다니고, 

주둥이는 송곳니라도 되는지 두꺼운 청바지를 거뜬히 뚫고 맛있게 피를 빨아댔다. 

물리면 주위가 퉁퉁 부어올라 흉측한 몰골을 만들기 때문에 

행여 얼굴이라도 물릴까 늘 노심초사 긴장을 해야 한다. 


OFF라는 모기 퇴치용 크림이 있긴 했지만 이 역시도 면역성이 생겼는지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유일한 방법은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는 것 밖에 없었다. 

추우면 모기가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융통성 없이 열 일하는 에어컨 때문에 내가 먼저 얼어 죽진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랬기에 모기를 잡아먹는다는 도마뱀이 이젠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일 밤 모기에 시달리다 보면, 

도마뱀이 아니라 비단구렁이라도 기꺼이 곁에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매번 도마뱀을 보면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고 

그때마다 그런 나의 모습에 도마뱀도 겁을 먹고 도망쳤었는데, 이젠 달라졌다. 


도마뱀을 보면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애써 모른척한다.

도마뱀도 인간을 보면 긴장을 하고 도망가기 때문이다. 

 

한참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보면, 

잔뜩 긴장하고 내 눈치를 살피던 도마뱀도 슬슬 안심을 하고, 모기 잡기에 열중한다. 

그 모습이 참 예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도마뱀이 꽤 귀엽고 이쁘다. 

우유 빛 투명한 피부에 사슴처럼 아름다운 눈망울, 

앙증맞은 손과 발은 귀여워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말을 알아듣는다면 내 몸을 타고 돌아다녀도 좋으니, 

수시로 달려드는 모기에게서 날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어? 실제로 그렇게 길들일 수 있다면.

엄청난 돈벌이가 될 것 같은데?




오빠. 내 방에서 도마뱀 데려갔죠?

내가 가져간 거 아니야. 그냥 자기 발로 온 거야.

아, 몰라요. 빨리 줘요. 내 도마뱀 돌려줘요.


아씨. 안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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