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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01. 2021

환장의 민폐 커플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마닐라 #영어연수 #민폐 #커플




한동안 지켜본 결과, 나의 룸메이트 테일러는 태생부터가 나와는 달랐다. 

이런 류의 사람에 대한 나의 반응은 두 가지다. 

전혀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게 강한 호기심이 생기거나, 

사소한 말 한마디도 견딜 수 없이 거슬리거나. 

테일러의 경우엔 후자였다. 

융통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무엇보다 세상 모두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지독히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테일러와 내가 시시콜콜 부닥치는 부분은 다름 아닌 공부하는 스타일이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방에만 틀어박혀 단어를 외우고 두툼한 문제집을 풀면서 보내는 테일러를, 

도무지 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거면 한국에서 할 것이지 뭐 하러 필리핀까지 왔나 싶었다. 

반대로 테일러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필리핀에 온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어학원 등록도 안 하지,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필리핀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바쁘지, 

영어공부한답시고 책 대신 <섹스 앤 더 시티> DVD를 틀어대니, 

나를 무슨 한량쯤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형은 영어공부 안 해요?”

어느 날 테일러가 내게 물었다. 

그 말투에는 비꼼이 가득 담겨있어서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참 어린 동생과 싸울 수도 없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했지만, 

대답이 곱게 나가진 않았다.


“지금 하잖아. 네 눈엔 안 보이니?”

“드라마 보는 게 공부예요?”

“그냥 드라마가 아니지, 미국 드라마잖아. 그것도 자막 없는.”

“요즘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그래서 무슨 영어공부가 돼요?”

나, 회사에서 팀장까지 했던 몸이거든? 

영어 못해도 취업만 잘했거든? 

“그러는 너야말로, 영어가 전부인 양 굴지 말고 차라리 너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개발하는 게 어때? 영어를 잘한다고 일도 잘하는 게 아니거든. 그리고 대부분의 회사에선 영어를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아. 아예 안 쓰는 회사도 많고.”

“무슨 소리예요. 면접 볼 때 토익, 토플은 필순데. 영어는 기본이잖아요.”

“그렇다면 더욱더 얘기가 달라지지. 기본이라면 남들도 다 한다는 건데, 영어 외에 비장의 무기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넌 영어 말고는 잘하는 거 없지? 영어도 잘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인성을 먼저 길러야 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테일러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고양이와 개처럼 서로를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하숙집엔 테일러 외에도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또 한 명의 루나라는 ‘개 X’가 있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내가 무슨 말을 하던지 간에, 테일러와 함께 쌍으로 날 비아냥거렸는데, 유치했다. 


차츰, 둘에게 쌓여가던 안 좋은 감정은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급기야 폭발하고 말았다.


저녁 식사 시간, 

모두 식당에 모인 자리에서 둘은 중대 발표가 있다면서 한껏 분위기를 잡았다. 

평소에 목소리만 들어도 먹던 밥이 체할 것 같았던 나는 

조용히 식사를 끝내고 싶은 마음에 한마디 흘리듯 내뱉었다.


“왜? 둘이 사귀기라도 했어? 그렇다고 해도 연예인도 아닌데 호들갑은.”

심드렁하게 던진 말인데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평소라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속사포처럼 쏘아붙였을 루나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기까지 했다. 


뭐지? 작전을 바꿨나? 

난 평소와 다른 모습에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결국 테일러도 루나를 쫓아 방으로 들어갔고, 멀리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식당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 왜? 왜 웃는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면서 그런 거죠? 가끔 테일러 오빠가 루나 언니 방에서 밤새 있다가 하숙집 주인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요. 여기가 모텔도 아닌데. 아무튼 그래서 오늘 정식으로 사귄다고 발표하고 자유롭게 연애하겠다며 점심때부터 설쳐댔는데 완전 찬물 끼얹은 거예요.”

테미는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영어공부를 위해 마닐라로 온 젊은 부부가 2인실에 함께 묵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들처럼 이렇게 대놓고 할 줄은 몰랐다. 

물론, 1인실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다인실이라면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방을 사용하는 것만큼 달콤하고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만약 둘의 중대발표가 이런 건지 미리 알았다면 잠자코 있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해줬을 것이다. 

이 기회에 내 룸메이트 테일러가 루나 방으로 나간다면, 나에겐 둘도 없는 축복일 테니깐. 

사실, 나처럼 대놓고 싸워대지 않을 뿐이지 하숙집 사람들도 은근히 둘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특히 루나는 나와 하숙집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시키기 위해서 은근히 물밑 작업(?)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이도 있으면서 뭘 그렇게 남 얘기를 해요?’라고 핀잔을 듣던지, 

‘내가 아는데 아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답변만 들어야 했고, 

그때마다 루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쓸쓸히 가버렸다. 


그런 루나를 감싸주고, 같은 편이 되어 이해해주고, 

더 나아가 함께 날 씹어(?) 주는 유일한 사람이 테일러였다. 

둘은 정말 죽이 잘 맞았다. 


그런 마닐라의 최고 ‘싸가지’ 둘이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에 빠진 것이다. 

밤늦게 돌아온 테일러는 취해 있었다. 

지금까지 루나와 함께 있었나 보다. 

나의 성격을 아는데 분명 테일러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테일러! 아렘이랑 같은 방 쓰잖아. 좀 뭐라고 할 수 없어? 정말 재수 없어 죽겠어!’라고 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투정을 들었을 테니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테일러의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테일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해해주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남자로서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야! 너!”

하지만 테일러는 첫마디부터 도를 넘었다. 뭐? 지금 뭐라고 그런 거야? 너? 이건 아니었다.

“취했으면 곱게 자라.”

“한 판 붙자! 따라 나와!”

어이가 없었다. 

영어공부만 하더니, 자기가 한국인이란 사실도 까먹었나. 

어디서 국적도 없는 야만스런 문화를 습자지처럼 쪽 빨아와서는 까불고 있단 말인가. 

결국, 끝까지 객기를 부려대는 테일러를 따라 방을 나서는데, 

문 밖에서 누군가 후다닥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어렴풋이 루나의 방문이 살짝 닫히는 게 보였다.


‘그런 거였니? 너도 남자라고 여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주긴 싫었던 거니? 차라리 말을 하지. 그러면 연기라도 해줬을 텐데. 하지만 미안. 이젠 너무 늦은 거 알지?’

낡고 어두운 농구 코트에 도착한 우리는, 나란히 마주 보고 섰다. 

곧 나에게 쳐 맞으리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테일러는 두려움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끝까지 객기를 부려댔다. 

혹시, 또 어디선가 루나가 지켜보고 있어서 그런가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내가 잠깐 한눈을 판 그 순간, 

요란한 고함소리가 어둠을 깨고 허공에 울려 퍼지더니 테일러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깜짝 놀란 나는 ‘엄마야!’하며 살짝 피했고,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한 테일러는 날 지나치며 차가운 바닥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음.... 뭐냐, 이건?


넘어질 때 충격이 생각보다 컸는지, 아니면 ‘쪽팔려서’ 그런지, 테일러는 좀처럼 일어나질 못했다. 

영화에선, 이렇게 상대가 쓰러지면 ‘고작 그거냐!’며 ‘어서 일어나!’라고 자극한다. 

그러면 쓰러진 상대는 입가에 묻은 피를 (왜 넘어지고 입가에 피가 흐르는지는 알 순 없지만) 

손으로 ‘쓱’ 훔치고는 또 한 번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바닥을 뒹굴며 난타전이 펼쳐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서로에게 쌓였던 앙금은 서서히 풀리고 

기진맥진한 둘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나란히 눕는다. 

그때 꼭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동안 가슴에 담아둔 얘기를 꺼낸다. 

그제야 서로가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뭐. 

영화는 영화다.


난 절대로 영화의 주인공 따위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고 정정당당하지도, 심성이 착하지도 않다. 아니, 비열하기까지 하다. 


난 바닥에 쓰러진 테일러를 그대로 살포시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일어나려 애쓰는 테일러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면서 다시 넘어뜨렸다.

 

하도 큰소리 ‘뻥뻥’ 치길래 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어이가 없을 만큼 싱거웠다. 

결국 지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테일러를 그 자리에 버려둔 채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테일러는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농구 코트에서 그대로 잠든 건 아니겠지?

다음날 아침, 그래도 걱정이 되는 마음에 농구 코트로 나가보려고 하는데, 

루나의 방에서 나오던 테일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럼 그러지. 아무튼 이제 대놓고 같이 잔다 이거지?'

날 발견한 테일러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애써 외면하다 결국 

“어제 너무 많이 취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형이 바람 쐬러 나가자고 한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 그렇게 얘기해 달라고? 

내가 바람은 쐬러 나가자고 했다고? 

아.... 그래그래. 내가 때린 건, 없었던 걸로 하자. 

그렇게 그날의 사건은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이었다. 

앞으로의 마닐라에서 생활은 상쾌한 일들만 가득할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탐모’ ‘탐모’.

탐모는 무슨. 이게 애들 장난이냐? 무슨 게임인 줄 알아?

그러지 말고, 좀 일어나게 해 줘요.

거참 말 많네. 넌 입으로 싸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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