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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n 30. 2021

동남아에서얼어 죽을뻔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마닐라 #동남아 #에어컨 #냉동실




정말로 얼어 죽는 줄 알았다. 

한 겨울에도 초여름 날씨인 필리핀에서 얼어 죽는 줄 알았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이다. 


대부분 하숙집엔 방마다 70년대 이발소에서나 봄직한 낡고 조그만 에어컨을 설치해 놓는데 

이게 보기엔 이래도 그 성능만큼은 엄청났다. 


문제는 너무 구형이라 리모컨이 없다는 것. 

깨어 있을 땐 추우면 껐다가 더워지면 다시 켜면 되지만, 

밤에는, 잠이 들면 얘기는 달라진다. 

자다 말고 일어나 에어컨을 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참으로 귀찮은 일이었다.


그날 밤이 그랬다. 

마침 하숙집에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람이 있어 송별회 겸, 

뒤늦은 나의 환영회 겸 해서 조촐한 자리가 마련됐다. 


하숙집은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가고, 

금세 또 다른 사람이 얼굴을 내미는 정거장 같았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술자리는 자정이 넘어서 겨우 정리되는 듯했는데,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람을 중심으로 또 한 번 뭉치는 분위기였다. 


난 아직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빠질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잔뜩 취해 있어서 이기도 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자,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축 늘어진 몸에 슬슬 뜨거운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 덥다! 

겨우 다시 몸을 일으켜 샤워를 끝냈지만 그래도 더웠다. 

술 때문인지, 마닐라의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짜증스러울 정도로 더웠다. 


결국 에어컨을 가장 세게 틀어놓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오돌오돌 떨리면서, 대자로 뻗었던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왜 이렇게 춥지? 아! 에어컨.’하는 생각은 드는데도 

깊은 잠에 빠진 탓에 도저히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덮고 있는 이불도 신문지만큼이나 얇은 천이라 

그걸로는 죽일 듯이 찬 기운을 뿜어대는 융통성 없는 에어컨을 당해낼 순 없었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며 

매트리스 커버 속까지 파고 들어서는 누에고치처럼 몸을 똘똘 말았다.


꿈을 꿨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꿈을.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미친 듯이 날 흔들며 목이 터져라 고함치고 있었다.


잠들지 마라! 

여기서 잠들면 죽는다! 

우린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아침 먹어요. 우와! 뭐야 여긴. 완전 냉동실이네.”

옆방 동생인, 테미가 아침을 챙겨준다며 내 방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열린 문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급속히 빠져나가고 따뜻한 공기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 따뜻하다.


몽롱했던 정신이 돌아오고, 

밤새 추위에 굳어버린 팔다리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우두둑하는 소리와 적지 않은 통증이 밀려왔다. 


사람은, 너무도 쉽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남아에서 얼어 죽다니.... 믿을 수 있을까?




“오빠, 안 추워요?”

“추… 추워.”

“근데 왜 이러고 자요?”

“저기… 에… 에어컨 좀… 꺼줘.”

“네? 일부러 켜놓은 것 아니에요?”

“자다가… 일어나서 끄는 게… 귀… 귀찮아서.”

“….”

“….”

테미는 한 동안 말없이 날 내려다보더니 가만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물론, 에어컨은 그대로 켜놓은 채.


아씨, 안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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