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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n 29. 2021

하숙집 구하기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마닐라 #하숙집 #변기 #단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걸까. 

정신없이 창문을 두들겨대는 굵은 빗소리에 슬그머니 눈이 떠졌다. 


거리엔 동네 꼬마들이 비누를 들고 나와 서로의 머리를 감겨 주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봤을까? 낯선 그 풍경에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정겨웠다. 


나도 한번 자연의 물줄기 아래서 샤워를 해보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 버린 나에겐 망설일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고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지금 이건 꿈일까?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낯선 방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내 방이 아니잖아? 아! 마닐라에 왔었지? 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맞다! 생일파티!


그 순간, 전기가 흐르기 시작한 필라멘트처럼 지난밤에 일어난 일들이 반짝하고 모두 기억났다.

아! 이 무슨 ‘개 쪽’이란 말인가!


“일어났어?” 

마르코가, 다정하게 아침인사를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장이라도 어디 먼 곳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르코는 아침식사를 하자며 식당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벼룩도 낯짝이 있는데, 마음이 불편해서 그럴 순 없었다. 

지금이라도 고맙다는 인사만 남기고 슬쩍 나가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엘리사의 하숙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어젯밤 택시를 타고 온 터라 돌아가는 길을 기억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주소를 적어 놓은 쪽지도 짐과 함께 엘리사의 하숙집에 있었다. 


“엘리사는?”

“새벽에 돌아갔어. 씻고 다시 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아.... 그나마 다행이네. 버리고 간 건 아니구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침 내내 쏟아지던 빗줄기는 오후가 되자 순식간에 멈췄고, 

곧바로 살점을 뜯어버릴 것 같은 쨍쨍한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습을 바꿔버리는 마닐라의 날씨가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잘 잤어요?”

비가 멈추고 난 후, 엘리사가 돌아왔다. 

다시 보니 너무나 반갑다. 

따지고 보면, 어제 처음 알게 된 사이일 뿐인데, 수십 년을 알아온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엘리사가 고맙게도 오늘 하루 나와 함께 다른 하숙집을 알아봐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솔직히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고마운 일이었고 무엇보다 마르코의 집에서 나갈 수 있어 기뻤다. 

물론 마르코는 낯선 이방인을 정말 따뜻하게 대해줬지만, 

그래서 더 미안하고 염치없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서둘러 도망치고 싶었다. 


거리에 나오니 방금 전까지 정말 그렇게 많은 비가 내렸나 싶을 정도로 

거리엔 조금의 물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닐라의 햇살은 그만큼 강렬했다. 

직접 피부에 닿으면 얇은 면도날로 살결을 도려내는 듯이 따가웠다. 

이 강렬한 햇살 때문에 마닐라는 눈부실 정도로 밝았다. 

희미한 백열등 하나뿐인 작은 골방 안을 연상케 했던 어젯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한걸음 정도 앞 서 걷는 엘리사의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문득 내 몰골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심하게 헝클어져 있는 머리와, 면도도 하지 못한 푸석한 얼굴. 

그리고 누가 쏟았는지 모르겠지만 옷에 물든 와인 얼룩은 지난밤 치열한 싸움이라도 벌인 듯했다.


“저기 죄송한데요. 좀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대로 하숙집을 알아보러 돌아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어느 하숙집에서 이런 몰골의 하숙생을 좋다고 받아주겠는가!


"음.... 그렇긴 하네요. 주인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잠깐 씻고 옷도 갈아입도록 할게요." 

일단 엘리사의 하숙집으로 돌아온 나는 염치 불고하고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다. 

내 하숙집이 아닌 이상, 화장실을 쓰는 것도 눈치 보이는데, 샤워라니. 

새삼, 엘리사의 친절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염치없는 녀석은 끝까지 말성이라고,  

샤워를 하기 전 사르르 배가 아파 큰일(?)을 해결했는데, 난감하게도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왜 이럴까 싶었는데, 기에 받아둔 물이 없었다! 


아! 정말, 죽고 싶다. 


하는 수 없이 변기에 물을 쏟아부어 해결하려 했지만, 이게 웬 일! 

아무리 수도꼭지를 돌려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물이 충분하지 않아 밤새도록 커다란 물탱크에 받아 둔 물로 하루를 버틴다고 하더니, 

지금, 그 물탱크의 물이 바닥난 게 분명했다.

 

이대로 모른 척하고 도망쳐 버릴까? 


“아렘. 아직 멀었어요? 옆방 동생이 화장실 쓰고 싶다고 하는데.”

설상가상. 엘리사가 화장실 문을 두들기며 날 재촉했다. 

“그, 그게요.”

아니다! 솔직히 말할 수 없다. 

이 안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다 해도 변기의 물을 내리지 못했다는 말만은 할 수 없었다.


“머, 머리에 비누칠을 했는데, 물이 끊어져서요.”

난 서둘러 마른 머리에 비누칠을 하기 시작했다. 

말과 행동을 같도록 하기 위함인데, 그러면서도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물이요? 거기 구석에 있는 고무통, 확인해 봤어요?”

고무통? 구석에 놓인 커다란 고무통이 눈에 들어왔다. 

뚜껑을 열고 안을 보자, 다행히도 많은 양의 물이 담겨 있었다. 


할렐루야!


하지만, 혼탁해 보이는 물이었다. 

뭔가 미끈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꺼림칙했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그 물로 겨우 변기에 물도 내리고, 대충이지만, 샤워도 끝낼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기다리다 지친 옆방 동생은 진작에 옆 하숙집으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아, 미안했다. 


그날, 저녁까지 하숙집들을 둘러봤지만 모두 대동소이했고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다간 어젯밤과 똑같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지막으로 둘러본 하숙집이 마음에 들었다. 

주인이 ‘우리 하숙집은 단 한 번도 물이 끊긴 적이 없다’며 자신만만해했기에 

더 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한 달 치 하숙비를 내고 계약을 해버렸다. 

필리핀에서 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비로소 이 낯선 곳에서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그 작은 사실만으로 마냥 행복했다.

행복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이제 짐 옮겨야죠?”

엘리사에게 맡겨(?) 두었던 내 슈트케이스를 찾으러 가는 길. 

엘리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고마움이 밀려왔다.


“고맙긴요. 저도 처음 마닐라에 왔을 땐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때의 고마움을 이렇게라도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인걸요. 

아렘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면 돼요.”


한 사람이 세 사람에게 ‘도움주기’를 해요.

그럼 그 사람이 또 세 사람에게 ‘도움주기’를 하는 거예요.

하지만 쉽게 도와주지 못할 것들을 도와줘야 해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중, 트레버의 대사


비록 한 명으로 시작하지만 곧 세 명이 되고 또다시 아홉 명으로 늘어난다. 

아홉은 금세 스물일곱 명이 되고 그 뒤론 쉽게 암산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나눠준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따듯해지는 아름다운 발상이다. 

이런 기분을 엘리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선뜻 잘 알지도 못하던 낯선 누군가의 짐을 맡아주고 하루 종일 친절을 베풀어 주었던 걸까? 


지금의 감정이라면 나 역시, 갈 곳 없어 방황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선뜻 데려와 침대를 내주고 재워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일순간의 감정이라는 걸 잘 안다. 

나는 결코 엘리사처럼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더욱 대단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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