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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n 29. 2021

낯선 나라 낯선 하루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마닐라 #영어연수 #하숙집




"안녕(Hi)."

하숙집 입구에서 마주친 여자는 대뜸, ‘안녕.’이라고 말했다. 

유난히 짧은 머리에 시원스러운 미소가 무척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몇 시간 전. 

한국을 떠나오면서 마지막 들었던 말도, 마닐라에서 가장 처음 듣게 된 단어도 ‘안녕(Bye)’이었다.

 

“새로 온 하숙생?”

내가 말없이 고개만 끄떡이자, 여자는 큰 소리로 하숙집 주인을 불렀다. 

하숙집 주인은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하고는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어떻게 오셨다고요?”

목까지 잠겨, 몇 번이나 마른기침을 하며 하숙집 주인이 내게 물었다. 

방금 한국에서 왔고 오늘부터 하숙을 하려고 하니 방 하나를 달라고 했다. 

‘뭐라고요? 한국에서? 잘 왔어요. 가장 깨끗하고 좋은 방으로 안내해 줄게요. 짐은 그 커다란 슈트케이스가 전부 인 가요? 어서 들어와요. 밤인데도 날씨가 무척 덥죠? 시원한 음료수 금방 내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를 기대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ㅡ..ㅡ


하숙집 주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무언가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리 예약을 하고 왔어야 한다며 며칠 전에 이미 모든 방이 꽉 차서 빈 방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에? 정말? 

난처했다. 

물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 맡겨놓은 짐이라도 찾듯이 방 하나 달라고 했으니, 

하숙집 주인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미안해서 어쩌죠?”

물론 미안한 말투는 아니었다. 

게다가 미안하면 마루라도 괜찮으니 하룻밤만 재워주면 안 되나, 싶었다.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허탈한 웃음이 실없이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알았다며 발걸음을 돌릴 수도 없었다. 

이제 나에겐 더 이상의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늦은 밤에, 그것도 마닐라가 처음이라는 사람을 그냥 보내게요?”

처음부터 지켜만 보던 여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그거야.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 

여자는 꼼꼼하게 날 살피는 듯하더니 대뜸 내 슈트케이스를 번쩍 들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제야 하숙집 주인도 알아서 하라는 듯 유유히 들어가 버렸다.


“다음엔 꼭 예약하고 와요. 하숙집 주인 입장에서는 아주 곤란해요.”

방에서 나온 여자는 매우 친절하게 말했지만, 난 또 한 번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런 내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피곤하지 않으면 자신과 함께 나가자고 했다. 

어딜 간다는 설명도 없었다. 

자정이 훌쩍 넘긴 시간에 어디를 가려는지 궁금했지만, 난 아무 말 없이 여자를 따라나섰다. 

나에겐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택시를 세웠다. 

공항에서 오는 길에 이미 한 번 타서 그런지 벌써 마닐라의 택시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살펴보니, 현대의 프라이드(Pride)였다. 

외국에서 자국의 브랜드를 만나면 벅찬 자부심(Pride)이 생긴다. 

하지만 한국에선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프라이드 택시’라니!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신기했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택시가 빌리지를 빠져나갈 즈음 내가 물었다. 

그제야 자신이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은 걸 깨달았는지 미안하다며 생일파티에 간다고 했다.


“마르코라고, 제 티처의 생일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름이....”

여자가 물었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을 생일파티에 데려가는 사람이나, 

난생처음 보는 사람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생일파티에 따라가는 사람이나 

정상은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서먹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하고, 황당하다는 표현은 왠지 미안한, 

딱히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통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렘.” 

레인 메이커(Rain Maker)의 머리글자로, 

인디언들 사이에서 마술로 비를 오게 하는 사람을 가리키던 말이다. 

‘행운을 만드는 사람’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데, 

마닐라에서의 생활이 나에게 새로운 행운으로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영어 이름이었다. 


아렘으로 날 소개하는 순간, 

새로운 삶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주인공인 영화가 이제 막 크랭크인되는 순간이었다.


“난 엘리사예요.”

여자, 아니 엘리사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택시가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안에선 흥겨운 음악과 웃음이 뒤엉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대다수의 필리피노가 한국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불편한 건 오히려 나다. 

부르는 사람은 발음하기 힘들어하고, 듣는 사람은 자신을 부른다고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름이 이름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만다. 


물론, 내 경우엔 나를 새롭게 다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장난해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택시에서 내리지 않은 엘리사가 택시운전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30페소도 나오지 않는 거리를 100페소나 달라고 우기잖아요. 얘기하다가 미터기 올리는 걸 확인하지 못했어요. 아! 정말 이럴 때마다 짜증 나요. 우리가 한국인이라 그런 거예요. 한국인은 돈이 많다는 이상한 고정관념 때문에 어떻게든 바가지 씌우려고 하거든요.” 

내가 냈어야 했는데 싶어 지갑을 꺼내려 하자 엘리사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 여기서 돈을 주면 ‘한국인은 우기면 무조건 돈이 나온다’는 

말도 안 되는 공식을 인정하는 꼴이라 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했지만, 점점 험상궂게 변해가는 택시운전사를 보며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은 마르코가 나타나면서 정리됐다. 

택시운전사는 마르코와 몇 마디 나누는 듯하더니, 30페소만 받고 돌아가 버렸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엘리사는 계속해서 씩씩거렸고, 

그런 엘리사에게 택시운전사와 같은 필리피노라는 이유만으로 마르코는 무척 미안해하고 있었다. 

화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낀 마르코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뻘쭘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유난스러운 환영의 악수를 청해 왔다.


“연락받았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마르코의 손. 내 생에 처음 잡아보는 외국인의 손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외국인과 몇 번 대화를 나눌 기회는 있었지만 

이렇게 손을 잡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생일 축하해요.”

‘선물이라도 사 왔어야 하는데, 방금 마닐라에 도착해서 선물 살 시간이 없었

어요. 더 솔직히 말하면, 생일파티에 간다는 것도 방금 알았고요. 미안해요, 

빈손이라서. 하지만 진심으로 축하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happy birthday to you’가 전부였다.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라니. 

아.... 이 무슨. ㅡ..ㅡ

 

마르코를 따라 들어간 집 안에는 여기저기서 한국어. 영어. 타갈로그어가 뒤엉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시간이 가는 동안 꽤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눴는데, 미안하게도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쏟아지는 이름들 중 유일하게 ‘허니(Honey)’라는 이름만은 기억할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 반년 넘게 머물고 있다는 한국 남자였다.  

세상 모든 여자가 자신을 자기라고 불러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는 독특한 이유 때문이었다.


“같은 남자가 그렇게 부르는 건 어떻게 하고?” 

허니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나 보다. 

애써 태연하게 괜찮다고는 하지만 

문득문득 돌아본 허니는 멍하니 서있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기도 하고, 

잔뜩 풀 죽은 얼굴로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점점 공황상태에 빠져드는 듯 보였다. 


생일파티는 즐거웠다. 

한 잔, 두 잔 마신 술이 늘어갈수록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싶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이런 경험을 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셔버린 술이 늘어갈수록, 어색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긴장이 풀리며 파티의 한 부분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풀린 걸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올라온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구석진 자리에 놓인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던져버렸다. 


“괜찮아요?”

누군가 내 볼을 두들기는 느낌에 힘겹게 눈을 떴다. 

엘리사였다. 

여전히 시원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그나마 남아있던 긴장감마저도 말끔히 사라져 버려 결국 난, 

나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웅얼거리다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마닐라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근데, 누구야?

응? 나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야.

친구 아니었어?

응. 모르는 사람이야.

브라보! 하여튼 대단해.

누가?

너나, 저기 쓰러져 잠든 남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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