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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n 28. 2021

첫날부터 이럴래?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영어연수 #마닐라




밤 비행기로 도착한 마닐라의 첫인상은 ‘어둡다!’였다. 

단지 공항 건물에서 빠져나왔을 뿐인데, 가로등은 하나 건너 하나씩만 켜져 있고, 그마저도 밝지 않았다. 

조그만 백열등 하나 켜놓은 골방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고, 도시 전체가 그 아래 놓여있는 듯했다.

게다가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는데, 아주 깜깜했다. 


여권 사이에 끼워뒀던 하숙집 주소가 적혀있는 쪽지를 꺼내 들었다. 

마닐라에 오기 전, 내가 알아본 정보는 그게 전부였다. 

좀 더 준비한 게 있다면 필리핀 대사관에 미리 들려 59일 관광비자를 발급받은 것과 

인천 국제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 서점에 들러 산 필리핀 가이드북뿐이었다. 


‘괜찮아. 마닐라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잖아.”

라고 생각한 나의 안일함에 후회가 밀려왔다. 

하숙집 주소는 가지고 있었지만, 공항에서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했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텅 빈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군가 그랬다. 

여행은 준비한 만큼 보고 돌아가게 된다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많이 좀 알아보고 오는 거였는데.... 


<중경삼림>의 한 장면처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바쁘게 사라져 가는데, 

나만 제 자리에 멍하니 멈춰 서 있었다. 


처음부터 필리핀에 오려했던 건 아니었다. 

미안한 말이기도 하지만, 필리핀이란 나라가 어디 붙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내가 필리핀을 선택한 이유는, 

영어연수는 가고 싶고, 그렇다고 모아 놓은 돈이 많지 않고. 

알아보다 보니, 수업료며, 하숙비며, 물가며, 적당히 매력적인 필리핀을 알게 되었다.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기 때문에 먼 타지까지 가서 춥고 배고픈 생활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아마도, 필리핀이 모국어인 타갈로그어만 사용했다면, 필리핀에 올 일이 없었겠지 싶다. 

필리핀에서는 타갈로그어만큼이나 영어도 사용했다.


그건 그거고. 지금의 난, 

어두컴컴한 마닐라에서 좀처럼 알 수 없는 다음 순간을 걱정하며 깊은 한숨을 내 쉬고 있다. 

뭐,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지?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있었을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에 등골이 오싹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날 눈여겨보고 있는 낯선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짙은 갈색 피부와 가슴까지 풀어헤친 낡은 남방. 

시커먼 맨발에 달랑 슬리퍼만 신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얼핏 봐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주위엔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한패처럼 보였다. 

도로 치닫는 긴장감이 더해지면서 마치 수십 명의 그 사내가 날 노리고 있는 것 같은 혼란에 빠졌다.


- 왜 하필 마닐라야? 거기 위험하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세상천지 다 위험하지.


- 그래도, 혹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강도라도 만나는 거 아니야?

- 무슨 공항이 그렇게 허술하겠냐? 괜찮아, 걱정하지 마.


괜찮긴, 개뿔! 


정말 말이 씨가 되는 건가? 

마닐라에 오기 전, 친구들과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왜 친구들의 걱정을 좀 더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걸까?


사내는 이제 대놓고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왜! 왜 오냐고! 저리 가! 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먼 나라까지 왔을까?

필리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자마자 강도를 만나는구나! 싶었다.  


그때, 사내의 뒤편에 서있는 경찰이 눈에 들어왔다. 

오,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수호천사가 따로 없었다. 

서둘러 손을 들어 경찰을 부르려는데, 헛! 

간만의 차이로 검은 그림자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사내였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숨이 멋을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이대로 주저앉으면 모든 것이 엉망인 채로 끝나버린다. 

내가 원하던 삶의 끝은 이따위가 아니었다.


“으워워워워! 야! 너 뭐야!”

꺼져가는 용기를 억지로 끌어올려서, 사내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고요한 밤. 내 고함소리가 사방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내는 주춤했다. 분명 효과가 있었다. 좋았어! 연타다!


"뭐어어어어? 뭐 달라고! 원하는 게 뭔데! 땍! 가! 저리 가!" 

발악이었다. 

사내는 곧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 뭐지?'

사내의 표정과 손짓을 보니, 뭔가 오해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비디오는 알겠는데, 오디오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 이게 바로 타갈로그어인가? 

생전 처음 듣는 언어에 멘붕이 오는 듯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어느새 아까 본 그 경찰이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내 곁에 서 있었다. 

그는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영어라도 해도 내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정말 다행이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는데, 우습게도 사내가 나보다 더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경찰의 개입으로 상황은 곧 정리됐다. 

사내의 설명을 들은 경찰은 날 보며, 다시 한번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깐, 무슨 말인지 알겠죠?”

“무슨 말인지 알겠냐는 그 말은 알겠어요.”

하지만, 학창 시절 영어 점수는 10점대였던 내가, 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마치 대학입시를 앞두고 듣기 평가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아는 척할 수도 없었다. 

잘못 대답했다가는 어딘가로 끌려가 밤새 취조에 시달릴 것만 같았다. 

모든 상황이 내게 불리하게만 돌아가는 듯했다.


“이 상황을 이해했단 말이죠?”

“네? 뭐라고요? 천천히 다시 얘기해주세요.”

“상황을요? 아니면, 지금 한 말을요?”

“네? 방금 또 뭐라고 한 거예요?”

결국, 나와는 더 이상 대화가 안 된다고 판단한 경찰은 말을 멈춰버렸다. 

신 내가 들고 있는 여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경찰이니까 괜찮겠지? 

여권을 건네주자 빠르게 이름을 확인한 경찰은 사내를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눈치로 상황이 이해됐다.  

아마도 사내는 한국인 누군가를 픽업하러 왔다가 못 만난 듯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내게 혹시 자신이 픽업하러 온 사람이냐고 물었었나 보다. 


결국, 사내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돌아갔고, 경찰은 내게 여권을 되돌려줬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건가요?”

“한국에서 왔어요.”

“아니요. 마닐라 어디에서 머물 거냐고요.”

“마닐라엔 방금 왔어요.”

“....(이 새끼.... 죽일까? ㅡ..ㅡ)”

“....(멀뚱멀뚱)”

경찰은 대화를 중단하고, 잠시 날 쳐다보다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귀 옆에 붙이고 눈을 감았다. 


"아! 잠! 어디서 묵을 거냐고?" 

서둘러 하숙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꼼꼼히 주소를 살피던 경찰은 직접 택시를 잡아서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설명해 주었다. 

택시에 타고 창 문으로 돌아본 경찰은 

고맙게도 수첩을 꺼내 내가 탄 택시의 번호를 열심히 적고는 손까지 흔들어 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자, 방금 일어났던 일을 되짚어봤다.

선입견. 분명히 선입견이자 편견이었다. 

그것은 수많은 것들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하고 놓치게 만든다. 

필요 이상의 긴장으로 자칫 마닐라의 첫인상은 엉망이 될 뻔했다. 

친절하고 따뜻한 곳인데 말이다. 


열어 놓은 차창 사이로, 감미로운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고 있었다.

너무나 포근한 기분이 들어 그때마다 달콤한 잠에 빠져들고 싶어 진다. 

건 아주 사랑스러운 기분이다.


어디선가 바닐라향이 날아오는 듯했다. 

바닐라향 마닐라를 사랑하게 될 것 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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