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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n 26. 2021

그냥, 너랑 같은 하늘 아래 있기 싫어

낯선 설렘: 필리핀 / 에필로그

#사랑 #이별 #아픈사랑 #착한이별 #헤어짐 #꺼져


첫 경험보다, 첫사랑이 늦었다. 

모나게도 '사랑'이란 걸 믿지 않았기에 

가랑비에 젖어가듯 슬그머니 들어온 그 사랑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잘해주지도 못하고, 마음과 달리 서툴게 상처만 주고, 

결국 떠나는 그 사랑을 차마 붙잡지도 못했다. 


정확히 몇 년도였는지는 가물가물해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헤어짐을 전한 너 때문에, 

난 아직까지도 너와의 헤어진 날짜를 기억한다.   


그래도 까짓 사랑,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며칠 뒤, 길을 걷다가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에 비로소 이별을 깨달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젊은 날의 나였기에, 

왜 우는지도 모른 체 길거리 한 복판에서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3개월 뒤, 날 다시 찾아온 넌, 

헤어지자는 말보다 더 아픈 결혼 소식을 전했다. 

당장은 몰라도, 앞으로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과 한다고 전했다. 


널 축복해 줄 정도로 난 쿨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널 원망하거나 미워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너와, 너와의 날들이 반년 넘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매일 쳐 울던 눈물이 그래도 마를 쯤에, 


내 삶에 더 이상은 사랑은 없어. 

충분히 했으니까, 그걸로 됐어.


라는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에나 남길 명언(?)을 남기고, 

더는 너랑 같은 하늘 아래 있기 싫어서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너와의 부모님과의 첫 만남 때, 

영어를 할 줄 아냐고 묻는 너의 아버지와,

못한다는 대답에 한심하게 날 쳐다보던 너의 어머니의 눈빛을 떠올리며, 


호주행 영어연수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풍족하지 못한 주머니 사정에, 

기초는 필리핀에서 다진다는 당시 유행하던 필리핀 영어연수를 생각했고, 

2개월 단기 코스를 생각하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필리핀에서 2개월. 호주에서 10개월.

1년 만에 영어를 마스터해서 돌아오리라. 결심했는데.


아, 미처 몰랐다. 

공부랑은 담을 쌓았던 학창 시절의 나.

특히 영어는 100점 만점에 10점대에서 헤맸던 나였다는 걸.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연애 이야기도 아니고, 

영어 성공담도 아니다. 

어학연수의 정보를 담고 있지도 않다. 


그저, 

삶의 한 순간에,

어떤 이유에서든 충전이 필요한 시기에 떠난. 


그저 소소한 일상의 스케치일 뿐이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피식 거리며 웃게 되는 지난 추억을 정리하는 것뿐이다. 


* 내 생애 첫 해외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필리핀은 2003년도에 다녀왔다.




묵직한 무언가가 내 심장 옆에 자리를 잡고는, 수시로 ‘슬픔’의 자극을 보내왔다.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사정없이 쓰라린 채찍질을 해대는 통에, 무엇이든 해야 했다.


무작정 극장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특별히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곧바로 볼 수 있는 영화면 뭐든 상관없었다. 

평소라면 돈을 주고 보진 않았을 그 영화를 위해, 군말 없이 지갑을 열었다. 


자리는 맨 앞줄 한 귀퉁이였다. 

스크린과 너무 가까워 영상은 흐릿했고, 본 영화가 시작하기 전, 광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날 정도였다. 


영화 속 주인공은 지독히 말이 없었다. 

너무도 말을 아끼는 탓에 누군가 그와 키스를 해야 한다면 

심한 단내 때문에 곧바로 코를 막고 힘껏 따귀라도 올릴 것 같았다. 

그래도 가끔 낮은 목소리로 짧은 몇 마디를 내뱉긴 했는데 

그때마다 난 뻣뻣하게 굳어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자막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어야 했다.

 

짜증스러웠다.


의자 깊숙이 허리를 묻고 눈을 감고 싶었다. 

그래, 이렇게 자막을 보지 않더라도 영화 속 모든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영어공부나 해볼까?


순간의 그 짧은 생각이 무기력해진 나의 열정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영어공부는 그럴듯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이 지긋지긋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을 뿐이다.


곧바로, 비행기 티켓과 여권을 준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한 모든 것에 불안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너무 서두른 탓에 놓친 것도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곤란한 경우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이별은 내게 지독한 슬픔과 슬럼프를 남겼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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