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성현 Jul 08. 2021

상황극으로 배워요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마닐라 #상황극 #연극




자신의 앙증맞은 똥배를 무척 사랑한다는 티처, 미키는 유쾌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애교가 많고 얼굴도 제법 귀여워 친동생이 없던 나는 진심으로 미키 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했다. 


게다가 수업도 만족스러웠다. 

발음도 좋고, 교수법도 꽤 괜찮았다. 

그래서 연달아 네 시간을 신청했다.  

B사감은 이런 식의 수업 신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나를 무척이나 재미있어했다. 


하지만 네 시간은 오버였다. ㅡ..ㅡ

인정한다. 

칠은 괜찮았지만, 일주일이 넘어가자 금방 식상해졌다. 


게다가 안 하던 영어공부를 갑자기 하려니 툭하면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이 났다.

“집중해.”

”잠깐 쉬었다 하면 안 될까?”

“내 수업이 재미없어?”

“아니야, 내가 원래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래.”

“그래? 보기완 다르네.”

“그거 칭찬이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미키는, 펼쳐져 있던 교재를 덮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을 참고로 나에게 맞는 커리큘럼을 짜 보겠다고 했다.

“교재는? 교재로 수업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그럼 교재를 사라고 한 B사감은 뭐란 말인가? 

벌써 필기까지 해서 무를 수도 없었다. 

게다가 교재라는 것도 정식 교재가 아니라 복사본으로, 일종의 불법 교재였다.

당연히 수익금은 학원에 돌아간다. 출판사와 저자가 아니라. 

이 지독한 돈 벌래. 


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키의 본격적인 질문은 계속되었다.  


- 음악 못 듣게 한다고 가출까지 했었어? 문제아였구나?

- 일 년에 영화를 백 편 이상 본다고? 그 말은 믿을 수 없는데?

- 연극배우가 꿈이었어? 은근히 독특하네.


나에 대해 알아가던 미키는 내게 맞는 커리큘럼을 짜기 시작했다. 

팝송을 듣고 어떤 내용인지 설명하고,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마지막으로 다양한 상황극을 하자고 했다. 


미키의 커리큘럼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활용한 수업이라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로 재미있었다. 

특히 가장 좋아했던 수업은 여러 가지 상황을 설정해 놓고, 각자가 배역을 맡아 진행하는 상황극이었다.


내가 상황극을 통해 미키에게 영어를 배웠다면, 

미키는 그 상황극에서의 나의 대답을 통해 삶에 대해 배웠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려서인지 오빠로서 조언해 주고 싶은 것들이 많았고, 

미키는 나의 얘기를 언제나 가슴 깊이 공감하고 받아들였다. 


그 나이 또래라면 당연하겠지만, 

특히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미키는 언제나 남자의 심리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어느 나라를 가든 남녀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도마 위에 오르는 모양이다.


이번 상황극에서 미키는 ‘섹스(Sex)’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썼는데,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그때마다 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섹스는 결코 부끄러운 단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단어만큼은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왜 그래?”

“한국에선 그 단어가 조금 부끄러운 단어라서.”

“알아.”

몇 년째 티처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한국인에게 섹스란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줄기차게 섹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미키가 대단해 보였다. 

섹스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고 해서 개방적이라 말하는 것은 분명한 편견이다. 

그렇다고 보수적이라 할 수도 없었다. 

동전의 양면처럼 개방적이지 않으면 보수적이고, 

보수적이지 않다면 개방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찌하다 보니 상황극의 주제가 섹스가 되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할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

 

“남자들은 언제나 나랑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

“무슨 소리야. 남자는 다 섹스만 생각하고 사는 줄 알아?”

“사실이잖아. 아니라면 신께 맹세해봐.”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지.”

“아하! 아무리 상황극이지만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남자는 진짜 그런 존재가 아니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하하하. 글쎄?"


미키의 뉘앙스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남자와 여자를 나누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다. 

다 같은 사람일 뿐이지 않은가? 


남자를 섹스에 굶주린 짐승처럼 말하며, 

그것을 달래주려 떡 하나 던져줬다는 식의 표현은 거슬린다.


"이래서 어려서부터 정확한 성교육을 받아야 해.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신체 차이에 대해서, 혹은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에 대한 생물학적 교육을 얘기하는 게 아니야. 그렇다고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피임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진정한 성교육은 세상에 존재하는 성에 대해서 편견을 갖지 않도록, 이해시키고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야. 도대체 남자라는 성에 대해서 뭐라고 배운 거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자제력과 이성을 존중하는 마음도 없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그래, 이런 건 다 일방적인 교육방식 때문이야. 성에 대해서, 이성끼리 거부감 없이 토론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줘야 해.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지. 그래야 서로에 대한 오해도 깨지고, 편견도 없어지는 거잖아. 그것은 음지로 숨어드는 추악함과 부끄러움으로 잘못 포장하지 않고, 성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며, 올바르게 성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얘기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지는 거야.’


라고 (영어로)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은 분명한데,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으! 답답했다. 

이러한 생각 모두를 정확히 영어로 표현하지 못함에 짜증이 났다. 


"그래! 지금 우리는 영어공부를 하는 거야. 영어 공부가 왜 필요한지 알겠지?"

미키는 늘 이런 식으로 은근히 날 자극했고, 

그때마다 영어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남녀의 차이. 

이건 공부를 위한 역할극이자 상황극일 뿐,

나중에 술 한잔(티쳐와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시는 문화)하면서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면, 

미키는 상황극 때와 달리 사고방식까지도 꽤 멋졌다.


그랬다. 

영어를 얼마나 유창하게 구사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영어로 무슨 내용을 얘기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대학을 나와서도 끝없이 했던 영어공부지만, 이처럼 절실하게 와닿은 적은 없었다.

 

영어공부는 더 이상 그럴듯한 명분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로니카는 나의 진정한 첫 영어 선생님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학원 블루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