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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08. 2021

어학원 블루스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마닐라 #영어공부 #어학원 


이 글은 2003년에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필리핀의 영어 관련 어학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최근 필리핀의 어학원은 많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최신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꼭 포털 검색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어학원 등록 안 해요?” 

영어공부를 위해 마닐라에 온 사람이라면 으레 당연한 어학원 등록을 하지 않고 있었더니, 

이제는 약속이나 한 듯 아침마다 하숙집 사람들이 내게 하는 인사는 하나였다.

영어공부는 마닐라에 오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일 뿐이었다. 


“어학원 등록하지 않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응. 많이 이상해요.”

서두르지 않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학원에 등록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오! 드디어 어학원 다니기로 한 거야?”

어학원을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난 반가운 얼굴은 엘리사였다.

“일단은 견학이야. 좀 둘러보고 정하게.”

"그래그래, 첫 단추가 중요한 법이지."

마닐라에 온 첫날부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엘리사와는 그 후로도 종종 만났고 

어느새 편하게 말을 놓을 정도로 제법 친해져 있었다. 


"어? 형!"

"어? 오빠!"

엘리사 외에도 알게 모르게 평소 친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다들 나보다 어리다. 

아, 공부에도 다 때가 있다고 하더니, 난 너무 많이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는 얼굴이 많다 보니, 어학원은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다.


어학원 복도에는 티처들의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고 그 밑에 시간표가 붙어 있었는데 

학생들은 이 시간표에 나와있는 빈 시간을 확인하여 수업을 신청하고 있었다. 

맨 투 맨 수업이 기본이라 누군가가 먼저 신청해 놓으면 그 시간엔 더 이상 신청할 수가 없었다.


“오늘 처음 왔나요?”

시간표 앞에 서 있는데,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처럼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원장이었다. 

사람은 직업에 따라 분위기가 변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깐깐해 보이면서도, 뭔가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B사감(난 원장을 그렇게 불렀다)은 

어학원도 일종의 비즈니스라 생각하는지, 나를 학생이라기보다는 클라이언트처럼 대해 줬다.

참 익숙하지 않은,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원장을 따라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수업을 하는 방이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가 ‘ㄱ’ 자 모양으로 놓여 있었고 

그 안에서 티처와 학생이 나란히 앉아 수업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집으로 오면 튜터. 학생이 찾아가면 티쳐. 편의상 이렇게 구분하고 있었다. 


도서관도 있었다. 

작긴 했지만, 자습을 하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책은 있는데 사람이 없는 자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 빈자리의 주인들이 있는 곳은 휴게실이었다. 

휴게실 안에는 수업이 없는 티처들과 수업을 끝낸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모두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터라, 이것은 일종의 시간 외 수업이라고 하겠다. 


조금 충격이었던 점은 티처들과 학생들이 아무렇지 않게 마주 보고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왠지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곧 나도 적응해 버렸다.


“수업을 신청하면 그 시간에 맞춰서 승합차가 하숙집 앞까지 찾아갈 거예요. 반대로 수업이 끝나고 돌아갈 땐, 해당 빌리지로 가는 승합차를 찾아서 타면 되고요. 오늘부터 등록할 거죠?”

마지막 설명까지 끝낸 B사감이 슬며시 수업 신청서를 내밀었다. 


수업 신청서를 받아 들고 빈칸을 채워 나가면서도 속으로는 잘하는 일인가 싶었다. 

게다가 당장 누구랑 수업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우리 어학원의 모든 티처들은 명문대를 나왔고 실력도 좋아요. 우선 몇 명 추천해 줄 테니, 수업을 들어보고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바꿔 줄게요.”

대부분 신청한 날을 기준으로 한 달 정도의 수업을 진행하는데, 

수업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면 몇 번이라도 다른 티처의 수업으로 바꿀 수 있을 만큼

여기서는 뭐든 학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수업료를 내는 사람은 학생이기에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적응이 안 되는 게 사실이었다.




수업 신청을 하고 나면, 교재도 사야 하고, SSP도 신청해야 하는 건 아시죠?

네? 아… 네.

참, 실력 있는 티처는 수업료가 조금 비싼데 그것도 알고 있죠?

네? 아… 그렇군요.

원하면 한 달에 한 번 있는 MT도 신청할 수도 있는데, 아까 설명했었죠?

네? 아… 들었어요.


결국, 돈 얘기만 들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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