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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09. 2021

약속시간에 당당하게 늦는 법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마닐라 #라디오




금요일 저녁, 미키가 자신의 차를 끌고 나를 픽업하러 왔다. 

“미안, 좀 늦었지?”

“아니야. 약속 시간엔 맞춰 갈 수 있겠지?”

“응. 가능할 거야.”

차에 올라타자마자 미키는 힘껏 액셀을 밟으며 서두르기 시작했다. 


미키의 차를 처음 타본 건 아니었다. 

몇 번 얻어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찌나 험하게 운전을 하던지 카레이서가 따로 없었다. 

스피드를 즐기는 탓인지 조금만 길이 막힌다 싶으면 어김없이 경적을 눌러댔고, 

그때마다 난 창피함에 고개를 숙인 채 좌석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비가 올 것 같은데? 서둘러야겠다.”

미키의 말에 하늘을 쳐다보니, 방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이 금세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닐라에선 수없이 만날 수 있는 게릴라성 폭우라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미키는 거대한 태풍이라도 오는 것처럼 긴장한 모습으로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자칫 사고라도 날까 싶어 조금만 천천히 달리자고 하자 베로니카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돼. 와이퍼가 고장 났어.”


뭐?

와이퍼가 고장 났다고?


미키의 차는 찌그러진 부분도 많았고, 여기저기 도색이 벗겨져 흉한 모습이었다. 

비단 미키의 차뿐만이 아니었다. 

필리핀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더 흉한 모습의 낡은 차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와이퍼가 고장 났다는 말에, 살짝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필리핀이란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럼, 오늘 아침에 고장 난 거야?”

“아니, 한 삼 년 전쯤?”


뭐?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삼 년이란다. 

그럼 삼 년 동안 비가 내리면 운전을 안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물을 제거하면서 달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맑은 날만 탈 수 있는 차라니. 


아니지, 지금처럼 갑작스럽게 비를 만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지난 삼 년 동안 이런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 테니, 분명 무슨 묘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 우기가 있는 필리핀만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비를 만나면 말이지.... 그냥 멈췄다가 그치면 다시 운전해.”


아, 그렇구나. 

그지 그지. 비가 내리면 운전을 못하지.

비가 오는 데 와이퍼를 사용할 수 없는 건, 눈을 감고 운전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 비가 오면, 와이퍼 없인 운전을 할 수 없으니,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그냥 차를 세우고 운전을 안 하는구나. 


명답이네. 

참 간단명료하네. 


아니다!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멈춰 서서 기다리기만 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와이퍼를 고쳐!”

“뭐하러? 비 오면 운전 안 하면 되는데.”

미키는 왜 그렇게 멍청한 말만 하냐는 표정으로 날 봤다.


ㅡ..ㅡ

동문서답일까? 

우문현답일까? 

ㅡ..ㅡ;;;


우씨. 

말이 씨가 된다고, 

결국 약속 장소를 불과 몇 킬로미터 남겨두고 무섭게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 갇히고 말았다. 

농담이 아니었는지 미키는 도로 한 편으로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핸드백에서 책을 꺼내고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상당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미키.... 우리 있잖아. 이러다간 약속 시간에 늦는다고.”

“어쩔 수 없잖아.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비가 쏟아지는 걸 나 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러니까, 와이퍼를 고쳤으면 됐잖아.”

“비 오면 운전 안 하면 되는데 왜 자꾸 와이퍼를 고치라고 하는 거야?”


ㅡ..ㅡ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도 아니고.

대화 자체가 안 되고 있었다. 


문화의 차이란 게 이런 걸까? 

아무리 내가 차근차근 다시 설명을 해도 미키는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고장이 나는 게 당연한데, 그때마다 고칠 수는 없다고 했다. 


미키는 정말 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자신은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하는데 왜 이해하지 못하냐며 긴 한숨까지 내쉬었다.


응.... 그만하자.

그래, 그만해야 했다. 


이러다간 내가 필리핀에 오기도 전에, 훨~~~~~~~씬 전에 고장 났었던 와이퍼 때문에 

괜히 미키와 큰 다툼이라도 벌일 것만 같았다. 


그래, 따지고 보면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미키의 말대로, 잠시 비가 멈추길 기다리면 되고, 약속(따위)에 늦으면 된다. 


필리핀 타임이라고 하더니.

약속에 왜 다들 그렇게 늦는지 알겠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서 비가 멈췄으면 하는 마음에 초조하게 하늘만 바라봤다.

약속시간은 이미 훌쩍 넘어버린 후였다. 


“아렘. 왜 그렇게 불안해해?"

내 표정을 읽었는지, 미키가 슬그머니 물었다. 


“약속 시간에 늦고 있으니깐.”

“하지만,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잖아.”


ㅡ..ㅡ;;;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똑같은 말은 그만하자. 


친구와의 약속?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차라리 미키의 말대로, 책이라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비가 그치기 전까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마음을 비웠다. 

그래,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고. 

적어도 비가 내리기 직전까지 최대한으로 달렸으니까. 

그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건 다한 거지. 


마음을 비워서일까?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차를 두들기는 빗소리가 감미롭게 들리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 일부러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들어가 눈을 감고 빗소리에 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 원래 빗소리 참 좋아하는데,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순간 이 기분을 제대로 만끽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차 안에서 빗소리를 듣는 게,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아닌가!


어느새 난, 미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창에 부딪친 빗줄기는 다양한 모양을 만들며 흘러내리고, 

라디오에선 제임스 모리슨(James Morrison)의 ‘You Give Me Something’이 달콤하게 흐르고 있었다.



You give me something

That makes me scared alright.

This could be nothing

But I’m willing to give it a try.

Please give me something.

Because someday 

I might call you from my heart.


<You give me something> by James Morrison



아! 최고의 선곡이었다. 

DJ도 분명 이 비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내 표정이 행복해 보였는지 미키가 제법 가벼워진 얼굴로 내게 비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비를 좋아하냐고? 미키! 한국엔 다섯 개의 계절이 있어.”

“네 개 아니야?”

“다섯 개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장마.”

“장마?”

“비가 아주 오랫동안 쉬지 않고 내리는 기간이야. 난 장마를 사랑해."

"아, 우기 같은 거구나."

"좀 다르지만, 그래 우기 비슷한 거야. 아무튼 난, 비가 만들어내는 이 아늑한 분위기가 좋아.”


아쉽게도 그 아늑함은 고작 한 시간 정도만 누릴 수 있었다. 

비가 멈추면서 끝나버렸다. 

당연히, 약속 시간에는 한 시간이나 늦은 거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아름다운 감성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으니까, 그게 더 좋았다고 하겠다.  

무엇이든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까. 


그 후, 우연히라도 제임스 모리슨의 ‘You Give Me Something’을 듣게 되면, 

그날 미키의 차 안에서 느꼈던 아늑하고 감미로웠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감성의 도시, 

마닐라에서의 또 다른 추억들과 함께 말이다.




형! 왜 이제와?

중간에 비가 와서.

미키 차 타고 왔잖아. 

와이퍼가 고장 났어.

와이퍼를 고쳤어야지!!!


ㅡ..ㅡ

그래, 한국 사람은 다 똑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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