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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3. 2021

몰랐었다, 내게도 편견이 있는 줄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필리핀 #마닐라 #인종차별 #차별 #동남아차별


지금의 난 동남아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뜬다 아세안>이란 책을 기획하고 출간했을 정도로, 

동남아는 내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나도, 나도 모르게 동남아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그것을 깨는 매우 중요한 에피소드이며, 

이 깨달음으로 난 진정한 동남아를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니는 어학원의 티쳐 중 한 명인 에밀리는 캐나다인이었다. 

금발에 백인이고, 미소가 매우 선했다. 


마닐라에서 백인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그 때문에 그녀의 수업은 늘 만원이었다. 


B사감도 에밀리의 수업만은 다른 티처들에 비해 조금 더 비싼 수업료를 받았는데, 

그 부분에 대해 항의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에밀리를 만난 건, 

미키가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홍콩으로 여행을 떠나면서였다. 


'필리핀인도 해외여행을 가는구나....'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조금 놀랬다. 

UP(필리핀의 대표 대학교)를 나온 미키가 가난하지 않다는 건, 행동과 씀씀이에서 알 수는 있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해외로 휴가를 떠나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마치, 미키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이, '동남아인은 여유롭게 해외여행을 하면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차별이라는 걸,

당시엔 깨닫지 못했다. 


아무튼, 미키가 수업을 비우는 바람에, 

마침 비어있던 에밀리의 수업을 운 좋게 들을 수 있었는데, 그녀의 발음은 확실히 달랐다.


'아.... 확실히 다르다.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다르다.'

난 영어, 특히 발음에 관해서는 나름 하나의 지론을 갖고 있다. 

이미 혀가 굳은 나이라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 지론은, 

세상의 영어는 ‘미국 영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 영어’는 그만의 특이한 억양이 있고, ‘일본 영어’ 역시 다소 우습게 들리지만 분명 영어는 영어다. 

‘한국 영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미국 영어와 얼마나 비슷하게 발음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영어를 활용해서 어떤 얘기를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밀리의 발음은 듣는 순간 부러웠다. 

에밀리처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는 생각이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렘은 F와 P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있어.”

네, F와 P 뿐이겠습니까! L과 R, B와 V도 엉망이다. 

이미 알고 있는 부분임에도 지적을 당하니 부끄러웠다. 


“물론,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 하지만, 그건 내가 선생이라 그런 거야. 우리는 훈련이 되어 있거든. 하지만 일반인들은 알아듣지 못해. 그리고 간혹 제대로 발음하지 않으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단어들도 있어. 그러니까 이왕이면 정확하게 발음하는 게 좋겠지?”

알고 있다고. ㅡ..ㅡ

맞는 말이다. 

멋지게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가 중대한 연설을 앞두고 ‘제 땡각은 이렇뜹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웃기겠는가!

하지만, 에밀리의 혹독한 발음 교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F와 P를 구분하지 못했다.


쥐가 날 것 같은 혓바닥을 달래려 커피나 한잔 하자며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 창가에 나란히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니 욱신거리던 혓바닥이 그제야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에밀리는 왜 마닐라에서 티처를 해?”

캐나다에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몰려올 것이고, 

환경 면에서 보나, 수입 면에서 보나 마닐라 보단 캐나다가 더 좋을 텐데 말이다.


“남편이 여기 살아.”

에밀리는 캐나다로 유학 왔던 필리피노와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왜?”

나의 첫마디는 ‘Why’였다. 

진심으로 그렇게 물었다. 


에밀리는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왔는지,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나를 웃으면서 노려봤다. 

그 묘한 표정을 보면서도 난 내가 무엇을 실수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당연히."

에밀리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아주 천천히, 한 단어 한 단어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듯.

"사랑하니까."


LOVE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난 내가 무엇을 실수했는지 깨달았다. 


왜?라는 한 마디에는 ‘왜, 하필이면 필리피노와 결혼을 한 거야?’라는 뒷말이 숨겨져 있었다. 

물론 필리피노를 무시하려는 의도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무의식에서 나온 나의 본심이었다. 


말해 놓고도 소스라치게 놀랐고, 곧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평소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 경멸했는데 나 역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이었단 말인가! 

만약 에밀리의 국적이 필리핀이고 남편의 국적이 캐나다였다면 난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을까? 

아마도 ‘그렇구나’하며 금방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름 깨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잠재의식 속에 난, 너무도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실망스럽고 부끄러웠다. 

이건 정말, 내가 생각해도 역겨운 편견이었다.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남녀차별, 아니 남성우월주의까지도 갖고 있었다. 


"남편이 필리피노라서 이상해?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야.”

미안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을까?

에밀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덤덤하게 웃으며 넘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 정말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결혼은 당연한 거였어."

‘사랑하니까 그랬다’는 말만큼 당연하면서도 아름다운 대답이 또 있을까?

 

“아, 아니야.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마닐라에서 살기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여기엔 에밀리의 가족도 없고, 친구들도 없으니깐….”

아, 정말 구차한 변명이다. 


썩은 생선 더미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변명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불쾌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런 날 다독여 주는 건 에밀리였다. 


“괜찮아. 무슨 얘길 하고 싶은지 알고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있잖아, 우리 남편이 가장 멋있었을 때가 언제였는지 말해줄까? 내게 청혼했을 때야. 그때 난 주위의 반대로 그 사람을 놓아주려고 했었거든.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그 사람은 내게 청혼을 한 거야. 그 사람이 나와 결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싸워야 했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

".... 너희 부모님? 아님 친구들?"


아니.

그 사람은.

사랑하는 나와 함께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나와 싸워야 했어. 


나랑.


"그게 지금까지도 가장 마음이 아파. 그래,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바로 나였어.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나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내 가족과, 내 친구들이 그를 어떻게 쳐다볼지 알고 있었고, 그게 마음 아팠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건 다 변명이었어. 나조차 편견과 차별 덩어리 었지. 그러면서 아닌 척 위선을 떨고 있었던 거야. 그런 나에게 그는 사랑한다고 했어. 결혼하자고 했어. 다 알고 있었으면서."

어느새, 에밀리의 눈가는 이미 촉촉이 젖어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한참을 아무런 말없이 하늘만 바라봤다.

 

“당신 남편, 누구보다도 멋있어!” 

나의 칭찬에 에밀리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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