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성현 Jul 13. 2021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텔레비전 #TV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았을까?

다행이다. 유튜브가 없던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라. 

ㅡ..ㅡ




“정말이야?”

몹시 흥분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티처들을 발견하고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갔는데, 

TV 방송에 나가게 됐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마음 맞는 티처들끼리 뭉쳐서 밴드를 결성하고 

수업이 없는 주말이 되면 바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연주하는 바에서 ‘밴드의 밤’이란 주제로 작은 콘서트가 열리는 걸 

방송국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촬영을 온다고 했다.


“아렘도 올래?”

선뜻 나를 초대하면서도 너무 작은 콘서트라 볼품없을지도 모른다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새로운 경험 아닌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당장에 가겠다고 말했다. 

오히려, 직접 눈으로 그 ‘열정의 무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울 뿐이었다.


공연 당일. 

생각보다 바는 작았다. 

‘작은 콘서트’라는 말은 조촐한 콘서트라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규모가 작다는 의미였구나 싶었다. 

 

좁은 바에 조명과 카메라가 들어가니 관객이 앉을자리는 턱없이 부족했다. 

통로 바닥까지 촘촘히 채워 앉고 나서야 MC는 콘서트의 시작을 알렸다.


오, MC가 있어. 

필리핀에서는 좀 알아주는 MC라고 하는데, 매력 있다. 

게다가 어딜 가나 MC는 말을 잘한다. 

물론, 따갈로그어고, 말이 너무 빨라 제대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곳에 있는 관객들이 수시로 박장대소를 하는 걸로 봐선 꽤나 재미있게 진행을 하는 듯했다. 


방송에 있어서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척 자유로운 진행을 한다는 점이다.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면 진행하면서 담배도 피우고 술까지 마셔댔다. 

저 모든 장면이 여과 없이 방송이 될까 싶기도 했지만, 

‘밴드의 밤’이니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연이 끝을 향해 달려 갈수록 MC는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취기 때문인지 처음보다 더 많이 웃었고 목소리도 한층 높아졌다. 


“놀랍게도 관객 중에 외국인도 있네요. 어디서 왔어요?”

MC가 갑자기 나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카메라가 휙 돌더니 나를 찍기 시작했다. 

순간 온몸이 경직되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우 한국에서 왔다는 짧은 대답을 하니 MC는 ‘오! 한국!’이라며 뭔가 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나를 포함해 함께 구경 온 하숙집 사람들까지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광란의 밤!”

한국어였다. 

MC는 그 말을 ‘파이팅’ 정도로 아는지, 툭하면 ‘광란의 밤’이라고 외쳤고, 

그때마다 나 또한 어색한 표정으로 MC를 따라 '광란의 밤'이라고 외쳐줘야 했다.


“혹시 한국 노래 좀 불러줄 수 있어요?”

아! 아무래도 이 MC, 단단히 취한 모양이었다. 

뜬금없이 한국 노래를 불러 달라니. 

무대에서 도망치듯 내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광란의 밤을 여러 차례 따라 외치며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빠져든 터라 안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몇 소절이라도 부르지 않는다면 영원히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자! 박수!”

정말이지 어딜 가도 MC의 진행은 천편일률인가 보다. 

잠시 주춤거리며 맥이 끊어지자 어김없이 박수를 유도했고, 

박수가 그쳐도 노래를 부르지 못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 노래를 선창 하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 아리랑~”

아리랑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튼 저렇게 아리랑을 부르면서도 분명 속으론 꽤나 진땀을 빼고 있을 것이다. 


‘내가 술을 너무 마셨지. 뭐 하러 한국인들을 무대로 끌어올렸을까?’라면서 말이다. 


그래,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자.

"오케이, 노래할게요."

내가 던진 말에, 잠시 쉬고 있던 카메라도 다시 돌기 시작했다.  


기어코 떠나버린 사람아 편안히 가렴. 

날으는 그 하늘에 미련 따윈 던져버리고. 

바뀌어버린 하루에 익숙해져 봐.

다른 눈의 사람들 속에서 외로워져도 서러워도 

나를 찾지 마.


<출국> by 하림


왜 그 노래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건 한껏 달아오른 열기는 내가 부른 '발라드'로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물론 ‘출국’은 좋은 노래다. 

하지만 내가, 그것도 무반주에 부르면 아주 밋밋한 읊조림이 돼 버린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 

난 음치다. 

ㅡ..ㅡ;


나중에, 방송을 보진 못했다. 

언제 하는지도 몰랐고 무슨 프로그램인지 묻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30분 넘게 무대에서 MC와 대화를 나눴고 마지막엔 노래까지 불렀지만, 

분명 통째로 편집됐을 것이다. 

지만 상관없다. 


나에겐 마닐라에서의 멋진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아무리 즉흥적으로 시켰다고 해도

어쩜 그렇게 노래를 못할 수가 있어?

혹시, 노래가 아니라 랩이었어?

도대체 불렀던 노래의 정체가 뭐냐고.


닥쳐라.

ㅡ..ㅡ





매거진의 이전글 몰랐었다, 내게도 편견이 있는 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