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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4. 2021

바람은 루머를 타고 분다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영어연수


필리핀 영어연수는 성인뿐만 아니라 초등학생까지 인기가 많았다. 

당연히 초등학생은 보호자와 함께 필리핀에 왔는데, 자발적인 기러기 가족이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모든 보호자들이 그러지 않지만, 루머가 단순히 루머가 아닌 경우도 많았다. 




필리핀에 있는 동안 정말 많은 루머를 들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그냥 켜놓은 텔레비전의 소음처럼 자연스럽게 들린다. 


나도 사람인지라, 특히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의 루머가 들리면, 귀를 쫑긋하며 듣게 되는 게 사실이다. 


"우리 하숙집 주인아저씨 있잖아. 가정부랑 밤에...."

"1대 1 튜터 할 때, 둘만 있잖아. 근데 내가 그 방에서 나올 때를 봤는데 다들 땀에...."

"이번 주에 새로 온 신입 있잖아, 꼬셨다며...."

"다들 외국이다 보니까, 좀 내려놓는 것 같아...."

"아들이랑 온 엄마 있잖아, 그래 그 사람. 아들 티쳐랑 주말에...."


물론, 루머는 루머일 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루머가 루머가 아닌 경우도 그만큼 많다. 

직접 내가 보고, 당사자에게 들은 내용도 많았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루머 중의 최고는 폴의 엄마인 베키에 관한 루머였다. (과연 루머일까?)


폴은 여름방학에 영어공부를 한다며 베키와 함께 마닐라로 온 초등학생이다. 

여기서 폴은 중요하지 않다. 바로 폴의 엄마인 베키에 관한 얘기니깐.


마닐라의 생활이 베키는 지루하기만 했다. 

폴의 교육을 위해 큰 맘먹고 마닐라에 왔지만, 폴이 어학원에 가버리고 나면, 

30대 후반의 베키에겐 마땅히 시간을 보낼 거리가 없었다.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말도 안 통하는 이곳에서의 생활은 점차 견디기 힘든 지루함이 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겁이 많은 편이라 혼자서는 시내 멀리까지 쇼핑을 하러 나가지도, 

마닐라 구석구석을 관광할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안녕하시죠?"

하숙집 주인이 다가와 안부를 묻듯이 툭하고 물었다. 

"아, 네. 식사가 맛있어요."

"제가 먹는 건 돈을 아끼지 않거든요. 잠자리는 괜찮고요?"

"네, 매일 청소도 해주셔서,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남편분은?"

"네? 아.... 한국에서 회사 다니고 있어요. 방학 때라 아들하고 경험이라도 해볼까 싶어서."

"그렇군요. 부부가 같이 온 분들을 보면, 같이 여기저기 다니시거든요. 혼자라 많이 지루한가 봐요?”

“네, 조금은요.”

“차라리 폴이랑 같이 어학원에 다녀봐요.”

“네?”

“아무래도 그 편이 좋지 않겠어요? 어른들도 영어 공부하러 오는 곳이 필리핀이잖아요.”

그날 오후, 어학원에서 원장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 베키를 볼 수 있었다.


베키의 첫 티처는 노바였다. 

중국계 혼혈인 노바는 큰 키에, 웃을 때 가지런히 드러나는 치아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온몸에 배어있는 특유의 친절함으로 어학원에선 꽤 인기가 많은 티처였다. 

또 그 인기만큼이나 꽤나 자극적인 루머도 끊임없이 돌았다. 

노바의 수업을 듣는 대다수의 여자들과 다 원나잇을 즐겼다는 루머였다.  

공공연히 노바는 그 모든 루머를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여기는 인물이기도 했다.


“너의 사생활에 대해서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너랑 사랑을 나눴다는 그 여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으로 그만 입을 좀 다물지 않을래?” 

한 번은 듣다 못한 내가 심하게 핀잔을 준 적도 있는데, 

노바는 ‘부러워서 그러지?’라는, 말도 안 되는 반응으로 일관했다. 


그런 노바와 베키가 만났다. 

노바는 베키가 마음에 들었는지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쳤고, 

경계를 하던 베키도 노바의 정성에 감동을 했는지, 결국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말았다. 


“노바, 사야 할 게 좀 있는데 슈마트에 같이 가줄래?”

“노바, 먹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찾아가질 못하겠네.”

“노바,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위험하다는 얘기도 있고, 좀 무섭네.”

노바는 이런 베키의 모든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슈마트에 같이 가준 덕에 멋진 옷을 한 벌 얻을 수 있었고, 

괜찮은 식당을 안내해 준 덕에 값비싼 요리를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었으며, 

마닐라 곳곳을 같이 돌아다닌 덕에 점점 베키라는 훈장을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높아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베키가 외박을 했다. 

아들인 폴이 어학원에서 주최하는 수련회에 간 바로 그날이었다. 

베키의 외박은 수련회가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노바의 새로운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 루머의 상대는 베키였다. 

베키는 루머에 대해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변함없이 노바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고 폴의 방학도 끝나가고 있을 무렵, 베키는 마지막으로 외박을 했다. 

밤새 엄마를 찾는 폴을 나에게 맡겨둔 채 말이다. 

그리고 폴과 베키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노바가 어학원에 무단결근을 하고, 누군가를 배웅해야 한다며 공항에 간 날이기도 했다.


베키와 노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직 둘만이 안다. 

가끔 마닐라 베이에 있는 호텔에 다정히 들어가는 걸 봤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루머가 그렇듯 대부분은 지어낸 얘기였다. 

오히려 자신의 얘기를 부풀려 말하는 노바도 믿을 수 없었다.


루머는 루머일 뿐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지만, 뭐가 중요할까. 

타인의 삶은, 그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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