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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5. 2021

이젠 잊기로 해요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아렘, 필리핀에 온 뒤로,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 안 해봤어?” 

베로니카가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내 친구가 말이야...."

직업상 많은 한국인을 알고 있는 베로니카에게 

호기심 반, 진담 반으로 한국인 남자를 소개받고 싶어 하던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베로니카는 고심한 끝에 자신의 학생 중에서 가장 착했던 한 남자를 소개해 줬고, 

이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피부색이 달랐다. 

그래서일까? 

서로에 대한 호감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서로에게 숨길 수 없는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사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는 날이 한없이 더디게 돌아오는 것 같았고,

여자는 남자를 만나는 날이면 몇 번이나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즐거웠고, 

하루하루가 너무도 짧았다.


주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며 많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들은 둘 사이를 더욱 강하게 묶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할 뿐이었다.

둘은 끝까지 예쁜 사랑을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뽐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너무도 순식간에 흐른 둘만의 시간. 

곧, 남자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공항에서 여자는 남자를 배웅했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남자는 이대로 여자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릎을 꿇고 청혼을 했다.


기다려 달라는 말과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남자는 상기된 표정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기다리겠다는 말과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말을 전하며 

여자는 한없이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 후로 둘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고

짧은 일정이었지만 두세 번, 남자는 마닐라로 돌아와 여자를 만났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랑한다는 말로 그 모든 것을 대신할 뿐이었다.


여자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먼저 결혼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남자는 결혼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굳게 다문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여자가 본 남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결국 남자와 연락이 끊어지고 친구는 내내 울어댔어. 그 남자, 아무래도 내 친구를 이용한 것 같아.” 

음.... ㅡ..ㅡ


마닐라에 오기 전에 친구들과 농담처럼 나눴던 얘기가 있다. 

가장 빨리 영어를 배우는 방법은 현지 사람을 사귀는 것이라 했다. 

영어도 늘고 어려움 없이 섹스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방법이자 상대의 감정을 철저히 기만하는 것인지를 모르고. 


“말해줘. 이용한 거지?”

베로니카는 그 남자를 대신해 나에게 사과를 받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난 베로니카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닐 거야. 아무래도 결혼은 집안끼리의 일이기도 하니까 그랬을 거야. 더욱이 우리 부모님 세대는 국제결혼을 싫어하거든. 하지만 난, 이건 그 남자와 네 친구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해. 사랑이란 결국 둘만의 문제니까.” 

베로니카는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하고는 멍하니 허공을 주시했다.


"국제결혼이라는 거, 다른 나라 사람과의 결혼을 말하는 게 아니지?"

"응?"

"피부색을 말하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너 보다 더.... 어둡잖아."

"음...."

반박할 순 없었다. 


“아렘은 언제 돌아가?”

내 침묵으로 대답을 들은 베로니카가 먼저 말을 돌렸다.  

“글쎄, 언젠간 돌아가야지. 한국에 내 삶이 있으니깐.”

“그럼, 여기엔 아렘의 삶이 없어? 마닐라에서 지내는 것도 아렘의 삶이잖아.”

“글쎄.... 삶이라기보다는 ‘쉼’이 아닐까? 언젠가는 돌아가야지.”

“그렇구나, 맞다 다들 돌아가지.... 있잖아, 난 영어 선생이라는 내 직업이 참 좋다고 생각했어. 다양한 사람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잖아. 하지만 결국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


그렇지 않아. 

앞으로 계속 연락하며 지내면 되잖아. 

그리고 휴가 때마다 마닐라에 올게. 

그럼 되잖아. 


아마 베로니카의 이야기 속 그 남자는 분위기에 취해 지키기 힘든 말을 내뱉고만 건 아닐까?

이런 말들은 지키지 못할 약속일 뿐이었다. 


“내가 너랑 친해지는 게 널 힘들게 만드는 걸까?”

담담한 물음을 던졌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많은 이별을 경험해야만 했던 베로니카에겐, 

나와의 만남도 결국엔 또 하나의 이별이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렇진 않아.” 

베로니카는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히려 슬퍼 보였다. 

"여기 있는 동안은, 우리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자. 여기에서의 생활도 결국, 아렘의 삶이잖아. 좋은 기억을 선물하고 싶어. 아렘의 영어는 영 늘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하하."

농담을 던지는 베로니카의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좋은 기억을 선물하고 싶다.

그 대답은 내게 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베로니카라는 사실도.




라랄라라 라랄라라 라랄라라

라랄라라 라랄라라 라랄라라

이젠 잊기로 해요

이젠 잊어야 해요

사람 없는 성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던걸 잊어요

이젠 잊기로 해요

이젠 잊어야 해요


<이젠 잊기로 해요> by 김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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