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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5. 2021

삼파기타 꽃의 전설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삼파기타 #꽃




견딜만한 여름 하나. 

툭하면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 여름 둘.

숨이 턱 막혀오는 살인적인 여름 셋.

그리고 다시 조금은 선선한 여름 넷.


4계절이 여름뿐인(?) 마닐라에서 

벌써 두 번의 여름을 베로니카와 함께 보내고 있었다.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베로니카가 물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이제 어학원은 그만하고, 하숙집에서 튜터를 좀 더 해볼까 해.”

나 역시 담담히 대답했다. 


티처와 튜터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매일 아침 머리를 감고 어학원에 갈 준비를 하는 게 점점 귀찮아지고 있었다.

* 티처는 어학원에서 강의를, 튜터는 집에서 과외를 하는 선생을 구별해서 표현한다.

 

베로니카와는 이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기에 어학원을 그만두더라도 종종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평소처럼 자주 어울리지 못할 거란 걸 우린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필리핀을 떠나는 날까지, 특별한 일을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면 볼 날도 없지 않을까 싶었다. 

서운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걸 우린 서로 알고 있었다.

 

내가 어학원을 그만두던 날,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걸으면서 소소한 얘기를 나눴다.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만나는 것처럼 너무도 일상적인 얘기들뿐이었다. 

아쉬움을 그렇게 달래고 있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얼마나 걸었을까? 

하얀 꽃 목걸이를 팔고 있는 아이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손에 들고 있는 목걸이를 내밀었다. 

진한 꽃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이게 무슨 꽃이야?”

“삼파기타야. 향기가 좋아서 주로 차에 걸어둬.”

베로니카가 대답해 주었다. 


아이에게서 삼파기타 하나를 건네받고 주머니에서 동전 한 움큼을 꺼내 보였다. 

알아서 가져가라고 한 건데, 

아이는 내 손바닥 위의 돈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세어보더니, 

그 돈에 해당하는 한 움큼의 꽃 목걸이를 내밀었다. 

아마도 동전의 수만큼 달라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하.


돌아오는 길에, 양이 많아 절반을 뚝 떼어내 베로니카에 게 내밀었지만, 

베로니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슬며시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왜? 냄새 좋아서 차에 걸어둔다며. 가져가."

“있잖아. 이 꽃은 전설이 있어. 우리 필리핀 사람들은 그 전설을 믿는 편이고."

"무슨 전설인데?"

"옛날 옛날에 약혼한 왕자와 공주가 있었는데, 왕자가 그만 전쟁터에서 죽게 돼. 그 후 매일 눈물로 지내던 공주도 결국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 죽었는데, 그 무덤 위에 핀 꽃이 바로 이 삼파기타야. 그 후로 사람들은 삼파기타에 사랑이라는 의미를 담기 시작했어. 그래서 사랑을 고백할 때 이 꽃을 선물해. 남자가 여자에게 바치며 고백을 하면 여자는 허락의 의미로 목에 걸어.”

잠시 말을 멈춘 베로니카는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받을 수가 없어. 하하. 우리, 그런 사인 아니잖아.”

그리고 베로니카는 웃었다.


베로니카에겐 그동안 자신을 떠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떠나면서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약속을 했을지도 모른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 

계속 연락하겠다는 약속.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 


과연, 그 약속을 지킨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약속은 지켜야만 약속인 것이다.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약속이 아니다. 

아무리 사소해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난. 

쉽게 약속이란 것을 하지 않는다. 

입에 바른 소리를 잘하지 못한다. 

말이라도 좋게 해 줄 수 있냐는 말도 많이 듣지만.

미안. 그 마저도 못한다. 

성격이 그렇다. 


약속을 할 당시의 진심을 거짓으로 변질되게 하고 싶지도 않고, 

약속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옭아매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짧았지만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고, 

고마운 마음으로 밝게 웃으며 담백한 악수를 나누고 싶었다. 

역시나 베테랑(?) 답게 베로니카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정말 안녕이구나. 

짧았지만, 즐거웠어.




삼파기타.

그 향이 이렇게 진한 건.

너무 큰 슬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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