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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5. 2021

나 게이야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게이 #성소수자 #편견




“나 게이야.” 

어학원을 그만둔 후 테미를 통해 소개받은 튜터, 조세핀의 첫마디는 ‘I’m gay’였다. 

‘guy’를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지만, 다시 한번 힘주어 정확하게 '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지. 

나랑 사귀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I'm not gay.'라고 대답해야 하나.


다소 당황스러웠던 그 첫인사는, 

조세핀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상처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조세핀은 한 아이를 맡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아이의 엄마로부터 험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한국어였고, 워낙 흥분한 상태에서 쏟아 뱉은 말이라 당시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기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화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그 엄마가 미친 게 아닌가 싶어서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를 오히려 걱정했단다. 


나중에, ‘게이가 어디서 감히!’라는 식의 내용이었다는 걸 전해 듣고는 

분하고 억울해서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에겐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고, 

그것은 그에게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고 했다. 


그 후로 조세핀은 한국인을 만나면 가장 먼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다짜고짜 밝혔고, 

(내 입장에서 본다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나 남자야’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너무도 어이없는, 말도 안 되는 그 인사를 조세핀은 매번 하고 있었다. 


그런 조세핀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나도 게이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있는 줄도 몰랐다. 

그동안은 게이를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 있었다 하더라도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이상 게이인 줄은 몰랐을 테니까. 


게이와 수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두고 망설이는 나를 돌아보면서,

아, 나도 게이에 대한 안좋은(?) 감정이 있구나 깨달았다. 

그 사람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갖게되는 안좋은, 선입견이었다.  

마음속에서는 그래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야단쳤지만, 머리속은 멍해졌다.  


상처 가득한 조세핀에게,

적어도 한국인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결국 조세핀의 '나 게이야.'라는 첫인사를 

‘나는 게이가 아니야’라는 인사로 애써 태연한 척 받아넘겼고, 

조세핀은 그제야 밝게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어느 정도 안심이 됐는지 조세핀은 수다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치마만 둘렀다고 모든 여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듯 

게이도 바지만 입었다고 모든 남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며, 

다행히도(?) 나는 자기의 타입이 아니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지, 고맙다.


하지만, 사실, 그때 거절했어야 했다.

첫인사로 나의 성향을 간 보던 조세핀에게, 

그만큼 나도 솔직해야 했다. 


나, 게이가 익숙하지 않아.라고.

아니, 더 솔직하게 나 게이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라리 처음부터 

조세핀에게는 미안하지만 다른 투터를 찾아보겠다고 했어야 했다. 

그때 거절했어야 했다.


내가 뭐라도 되는 사람인냥.

난 게이, 그런거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과시(?)때문에 그러지 않아야 했다. 

나 역시, 조세핀에게 험한 소리를 내뱉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업 중, 조세핀과 팔꿈치나 발 같은 몸의 일부가 살짝 닿기라도 하면, 

나는 경직되고 불편한 표정을 무의식 중에 표출하고 있었고. 

그때마다 조세핀은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조세핀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사과할 정도의 일도 아닌데 말이다.  


난 잠제적으로 조세핀을 벌래, 쓰레기, 범죄자 취급을 하고 있었다.

나의 위선자처럼 모순된 행동으로 또 한 번 조세핀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고 있을 뿐이었다. 

서로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세핀과는 어색해져 갔다. 


결국, 날 깐 건 조세핀이었다. 

먼저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조세핀과 수업을 시작한 지 2주 만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실력 있는 튜터였는데도, 난 그 순간 잡지 않았다. 

무슨 일 때문에 그만두려 하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나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냥 알았다고만 했다. 


마지막 수업 날, 조세핀은 짧은 쪽지를 내게 건넸다. 


아렘은 내가 만난 한국 남자 중 유일하게 웃으며 악수를 해준 사람이야. 

아직도 그날의 환했던 미소가 잊히지 않아. 

고마워.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넌 내 타입이 아닌 거 알지? 

하하. 우리가 좋은 친구로 기억되면 좋겠어.


그 후로, 조세핀은 더 이상 한국 남자의 수업은 절대로 맡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한국 여자들 사이에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자신도 왜 자기가 그렇게 한국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마도 게이 친구 한 명쯤 만들고 싶은 심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 인기가 전혀 기분 좋지 않다고도 했다.

(이해된다 인마. ㅡ..ㅡ)


어찌 됐던 조세핀의 진정한 가치가 떨어지지 않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 조세핀에게 응원을 담은 미소를 보내본다. 

 

아, 물론 먼발치에서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지만.




오빠, 누굴 그렇게 애틋한 눈으로 봐요?

혹시 조세핀 본거예요?

설마, 오빠?


아니라니까!

여자 좋아한다고!

여자에 환장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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