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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5. 2021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치과 #스케일링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유난히 새하얗게 빛나는 가지런한 치아가 매력적인 치과의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의 앞 주머니엔 금실로 닥터 셀리라고 새겨져 있었다.

 

치과에 들른 건 스케일링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마닐라의 치과도 괜찮다는 얘기를 했고, 

평소 육 개월에 한 번 스케일링을 받았기 때문에 가까운 치과를 찾아갔다.

 

“마닐라엔 일 때문에 왔어요? 뭐 하는 분이세요? 이름은요?”

스케일링을 받는 동안 셀리는 쉴 새 없이 많은 것을 물어왔다. 

입을 벌리고 있는 탓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음에도 말이다.

ㅡ..ㅡ

 

스케일링을 받는 동안 치과를 찾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셀리가 그렇게 수다스러운 건 모처럼 만난 손님(?)이 반가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스케일링이 끝나자, 셀리는 차 한 잔을 권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이것도 영어공부라고 생각했기에 셀리가 건네는 차를 고맙게 받아 마셨다.


셀리는 열심히 돈을 모아 앞으로 더 좋은 치과를 차리고 싶다고 했다. 

환자가 많지 않아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특유의 친절함 때문에 환자가 많이 찾아올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어딜 가도 치과는 비싼 모양인지, 꽤나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셀리는 의사로선 매우 환영할 일이라, 오히려 환자가 없어서 더 좋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아픈 사람이 적어졌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치과가 비싸서 그런 거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언제 집으로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나와의 수다가 즐거웠는지, 셀리는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집으로 초대했다. 

금 망설여졌다. 


설마, 그 잠깐 사이에 날 좋아하게 된 건가?

집까지 초대를 하다니. 

무슨 의미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는 

셀리는 호탕하게 웃으며 왼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남편도 좋아할 거예요.” 

내민 왼손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셀리는 정말이지,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수다쟁이 셀리를 다시 찾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피로 때문인지 입안이 헐어서 다시금 셀리를 찾았다. 

물론 치과에서 받을 수 있는 치료는 별로 없었다. 

간단히 입안을 소독해주고 비타민을 먹으라는 처방이 전부였다.


나도 뭐, 치료 때문이 아니라, 

지나가다가 잠깐 들린 것뿐이야. 

수다를 떨고 싶어서.


“친구랑 저녁 먹기로 했는데 괜찮다면 같이 갈래요?”

그대로 돌려보내기 미안했는지 셀리는 함께 나가자고 했다. 


그렇게 Q를 만났다. 

Q는 불청객인 나를 처음부터 대놓고 싫어했다. 

처음엔 미리 양해도 없이 불쑥 끼어들어서 그런가 싶었다. 

(셀리가 나를 데리고 간다고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않은 걸, 도착해서야 알았다. ㅡ..ㅡ)


그런데, Q가 대 놓고 날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가 아니라,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국 남자.


“난, 한. 국. 남. 자. 가 진짜 싫어.” 

이렇게 콕 집어서, 한국 남자를 대놓고 싫어한다고 말하니, 셀리도 엄청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냥 갈까도 싶다가, 

이유라도 들어보자는 생각에 자리에 앉아서 Q의 사정을 들었다. 

 

Q의 직장엔 한국에서 파견 온 상사가 세 명이나 있다고 했다. 

그들은 매일 하는 일 없이 여자가 있는 술집에서 밤새 놀고, 그 때문에 지각을 밥 먹듯이 한다고 했다. 

게다가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며 툭하면 자신을 무시하는데 짜증 나 죽겠다고 했다. 

필리핀 여자들은 한국에 팔려 간다는 말까지 해대는 통에 

화가 오를 만큼 오른 Q는 그들을 언젠간 꼭 죽여버리겠다는 암살 계획까지도 내게 말해줬다. 


Q의 사정을 듣는 내내,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건 한국 남자가 문제인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예요.” 

Q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한국 남자 모두를 싸잡아 무조건 싫다는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싫으면 싫은 거지.” 

Q는 완고했다. 

대화의 단절. 

답답했다. 


Q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얼마든지 좋은 한국 남자도 만나 볼 수 있는데, 

런 기회를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끝까지 설득하기엔 Q와는 별다른 인연도 없었다. 

같은 한국 남자로서 대신해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결국 더 이상 어떤 설명도 더하지 모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먼저 일어나야 했다.


배웅을 하던 셀리는 미안하다며, 

자신의 남편은 한국에 관심이 많아서 날 만나보고 싶어 한다며,

지난번 약속한 것처럼 꼭 한 번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도 싹 가신 후였다.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셀리는 내 미소가 가식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당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편견이고 오해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말과 행동이,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싫으면 싫은 거지.


상관이 있다. 

나 몰라라 할 일이 아니다. 

그 피해를 받게 되는 사람이 나의 친구나 가족일 수도 있지 않은가?


가만히 길을 걸어가다 

큼직한 돌멩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다. 

내가 한국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니, 그 멍청한 한국 남자들이 한국 남자 망신을 다 시키고 다닌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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