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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5. 2021

몸살감기엔 깔라만시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깔라만시




해는 많이 짧아져 이미 지고 있었다. 

잠깐 사이, 어둠은 금세 마닐라를 덮쳤고 난 우울했다.


기다림 때문이었다. 

기다림. 

난 기다림을 싫어한다.

 

‘미안. 오는 길에 지하철이 너무 막혀서’라는 식의 뻔한 거짓말은 곤란하다. 

‘가는 길에 너무 예쁜 옷을 봤거든. 30분만 더 기다려줄래?’라는 것은 괜찮다. 

후자는 기다림이 아니다. (내게는)

그건 배려고, 무엇보다 솔직한 이유를 내가 알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다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반면, 엘리사는 무작정 날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핸드폰도 없고, 만나기로 한 장소가 극장 앞, 길 한복판이라 달리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연락을 취하려고 카페라도 들어갈 경우, 그 사이 길이 엇갈리게 될까봐여서다. 


자막 없이 영화 보고 싶어서 마닐라에 온 거야?

응. 그런 셈이지.

이젠 자막 없이 영화 볼 수 있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럼 시험해봐야지. 다음 주 월요일, 극장 앞에서 만나. 


그 약속. 괜히 했다 싶었다. 

끝내 엘리사는 나오지 않았다. 

미리 사놓은 영화 티켓을 쓰레기통에 찢어 버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인파에 묻혀 쓸쓸히 걸음을 돌렸다. 


따지고 싶은 마음으로 엘리사의 하숙집을 찾은 건 아니었다. 

물론 화도 났었지만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해할만한 사정을 알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미움이 생길 것 같았다.


“엘리사 있어요?”

“방에 있을 거예요.”

또각거리는 나무 복도를 지나 엘리사의 방문 앞에 섰다. 


똑똑. 

낮은 노크소리. 


나는 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상하게 남자는 늘 여자의 방 앞에서 주눅이 든다. 


똑똑. 

다시 이어진 낮은 노크소리. 

이번엔 엘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들어갈게. 


엘리사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언뜻 보아도 많이 아파하는 모습이었다. 

평소 건강한 모습만 보여줬던 엘리사였기에 그 모습은 낯설었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온몸에 열이 나더라고.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점점 심해져서 잠깐 누워있다 시간 맞춰 나가려고 했는데, 약이 독했는지 기운이 없어선지 그만 잠들어 버렸어. 미안, 미리 연락하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어.”


아팠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했다.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내 집이라면 미역국이나 죽이라도 해서 먹이겠지만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깔라만시’였다. 

필리핀 레몬으로 통하는 깔라만시는 비타민이 풍부해 감기엔 최고였다. 


"잠깐만 기다려."

서둘러 깔라만시를 사 와 정성스럽게 즙을 짜기 시작했다. 

금귤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제법 단단했기에 즙을 짜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한 봉지 가득했던 깔라만시를 다 짜도 컵의 밑바닥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는, 

주 적은 양이 나올 뿐이었다. 


“얘, 정체가 뭔데?”

“깔라만시라고, 비타민 덩어리야. 마셔봐.”

"원액을?"

"응."

"물에 희석하지도 않고?"

"응. 그대로 마셔야 감기가 낫는다니까."

이미 내 손은 시큼한 냄새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혼탁해 보이는 깔라만시 즙은 진짜 먹어도 될까 싶었다.

하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날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엘리사는 아무 말 없이 

강렬한 신맛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면서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어때?”

“나중에 아프면 내가 해줄게. 먹어봐. 하하.”

“그렇게 이상했어?”

“하여튼 농담을 못해. 먹을 만했어. 고마워.”

컵을 치우고 침대 옆 의자를 당겨와 앉았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평소 엘리사는 잠이 많았는데도, 오늘 종일 잠을 잔 탓인지 쉽게 잠들지 못했고, 

그런 엘리사를 간호하며 한참 동안을 불편한 의자에 앉아 있었던 나는 허리가 뻐근해져 왔다. 

조금씩 몸을 비트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엘리사가 손짓을 하며 날 불렀다. 


“힘들지? 침대로 올라와.”

“괜찮아. 너 잠들면 곧 갈 거야.”

“알았어… 그럼, 내가 빨리 잠들어야겠다.”

하지만 엘리사는 새벽이 돼서야 겨우 잠들었고, 

그녀의 자그마한 숨소리가 방 안에 조심스럽게 울리고 있었다. 

잠든 엘리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아까 했던 말과는 다르게 쉽게 돌아가질 못했다.

 

또 그런다. 

내가 뭘.

자는 사람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거 아니랬지.

보면 안 돼? 되게 비싸게 군다.

자다가 깜짝 놀란단 말이야. 

예쁘기만 한데 뭘.

안 예쁜 거 알거든. 몰라. 저리 가. 빨리.


헤어진 여자 친구와의 지난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쉬는 게 힘들다며, 도망치듯 날아온 필리핀.  

필리핀의 익숙하지 않은 삶 속에 서툰 하루를 정신없이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잊히는 듯하다가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알고 있다. 더는 붙잡아 둬서는 안 된다는 걸. 

이젠 놓아줘야 한다. 


챙겨주고 싶은 다른 사람이 생긴 것 같아.

이제 그만 하자. 안녕, 나의 너.


어느덧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햇살이 무척이나 포근하게 느껴졌다.


엘리사는 여전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일곱 시 이십이 분. 

나의 아침은 새롭게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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