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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6. 2021

보라카이행 크루저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보라카이 #뭐라카이 #죄송합니다


오래전 보라카이를 방문했던 기록입니다. 

지금과는 많은 부분에서 사정이 달랐죠. 

병든 세상이 어서 나아서, 다시 한번 보라카이를 가보고 싶네요.




보라카이는 루손섬에 있지 않기에 비행기를 타야 했다. 

비행기. 얼마나 신나는 가. 

난 하늘을 좋아한다. 

언제라도 하늘을 난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뭔가 더 여행답게 느껴지는 건, 비행비보다는 크루저였다. 

 

태어나서 크루저를 타 본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크루저는 매일 운행하는 게 아니니까, 일단 마닐라 항구에 가서 티켓이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해요."

아는 동생이 조언을 해줬다. 

이왕 가는 거, 혼자 가는 것보다,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혹시 시간 돼?"

"보라카이라고...."

"비행기 말고 크루저 타고 갈 거야."

"오! 크루저란 말이지...."

엘리사에게 함께 가자고 물었다.  


왜, 엘리사에게 제안했는지,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단지, 같이 가고 싶었다.

다행히도(?) 엘리사는 재미있겠다며 여행에 합류하기로 했다. 


출발은 삼일 뒤였다. 

크루저를 이용하면 마닐라에서 보라카이까진 꼬박 반나절이 걸린다고 했다. 

그것도 곧 운행을 멈출지도 모른다고 하니 어쩌면 크루저 여행의 마지막 주인공이 될지도 몰랐다.

 

삼일 뒤.


“안녕.”

한들거리는 치마를 입은 가벼운 차림의 엘리사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필리핀에 있다고 하면, 다들 여행 중이라고 생각하던데, 

우리가 머물고 있는 마닐라는 서울 못지않은 도시다. 

따라서, 보라카이행 크루저는, 엘리사에게도 나에게도 오랜만에 즐기는 휴양이었다. 


날씨는 좋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맑았다. 

이런 날 여행을 떠날 수 있어서 기뻤다.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개뿔!

크루저를 타기도 전, 진이 다 빠질 일이 발생했다.


“마닐라 항구? 거긴 너무 멀어. 돈을 더 줘.”

쉽지 않은 여행이 되려는지 택시마다 고개를 흔들었다. 

한참을 실랑이하던 끝에 출항시간에 늦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미터기 요금에 100페소를 더 얹어 주는 걸로 최종 합의하고 나서야 택시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택시운전사는 가는 중간 주유소에 들르더니 기름을 넣어야 한다고 100페소를 미리 달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택시요금을 먼저 달라는 것도, 

기름 넣는 동안에 눈치 없이 올라가는 미터기도 짜증스러웠다. 


의 짜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닐라 항구 근처까지 온 택시운전사는, 

고장 난 에어컨을 고치러 당장 공장에 가야 한다며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우릴 내리게 했다.

"아니, 그걸 지금 고치냐고!"
따져 물었더니, 공장이 마침 항구 근처라서 그렇단다. 

 

사람이 너무 짜증스러우면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쉽게 간다 싶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엘리사도 같은 느낌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긴, 필리핀이잖아."

엘리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애써 웃었다. 

그래, 필리핀이잖아. 

가끔 이렇게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을 당하게 되면, 그 이유는 단 하나. 

이곳이 필리핀이기 때문이었다.


싸울 것도 아니고, 

경찰에 신고할 것도 아니고, 

방송국에 제보할 것도 아니고.


그냥, 내 기분 상하지 않도록 마인드 컨트롤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행인 건, 그래도 마닐라 항구와는 가까운 곳인지 트라이시클을 타면 될 것 같았다. 

정해진 요금이 따로 없는 트라이시클은 타기 전에 흥정을 해야 했는데, 

사실은 이것도 어지간히 머리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빈정 상한 택시를 타고 있기는 싫어서 내렸다. 

택시운전사가 뭐라고 항의를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려서 근처에 있는 트라이시클을 찾았다. 


마닐라 항구까지는 거리상 멀지도 않았기에 트라이시클운전사는 15페소를 제시했다.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다. 우리는 분명 타기 전 15페소로 합의를 봤다.

 

하지만, 이 녀석도 은근슬쩍 주유소에 멈춰 서더니, 

기름을 넣어야 한다며 나에게 그 15페소를 먼저 달라고 했다.


그래, 기름은 넣어야 하니까. 

15페소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건네주면서 살짝 뒷골이 당기면서 싸한 기분이 들었지만, 설마 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막상 내릴 때가 되니까, 역시나 말이 또 틀려졌다. 

도착해서는 100페소를 달라고 했다.

 

“아까! 15페소라고 했잖아요!”

“그래, 기름값이 15페소라고. 그건 아까 주유소 직원에게 줬잖아요.”

“아니, 트라이시클 비용이 15페소였잖아요!”

“그런 말 한적 없는데. 이렇게 먼데 15페소는 말도 안 돼요.”

“멀긴 뭐가 멀어요!”

“멀어요. 그러니 100페소는 받아야 해요. 어서 줘요.”


이 새끼들이. 

사람이 좋게 좋게 참았더니, 누굴 병신으로 아나!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택시를 타도 기본요금이 나오지 않을 거리였다.

그런데 100페소? 아니, 15페소는 기름 값이라고? 그 기름 값을 왜 내가 내야 하는데?

  

멱살을 잡고 면상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어느새 몰려든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며 무슨 일인지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심하게 표현하면, 그 모습이 마치 좀비 같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트라이시클 운전사는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 신나서 더 떠들기 시작했다. 

타갈로그어라 알아들을 순 없지만 분명, 

목적지까지 왔는데 요금을 내지 않는다며 이런 황당한 손님이 어디 있냐고 하소연을 하는 게 뻔했다. 

더 열 받는 건, 자기들도 트라이시클을 타기 때문에 100페소라는 건 분명 바가지를 씌운다는 걸 알 텐데, 

아무도 우리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팔짱만 끼고 과연 낯선 외국인이 돈을 내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히죽거리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냥 줘요."

엘리사가 체념한 듯 말했다. 

오랫동안 필리핀에서 지내왔기에, 

더 끌어봤자 우리 시간만 버리고 기분만 상한다는 걸 이미 많은 경험에서 알고 있었다.

 

지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선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갈 때까지 가보고 싶었다. 

아닌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넘어가면, 이 자식들은 한국인을 말랑말랑하게 보게 뻔했다. 


"이러다가 배 끊기겠어요."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100페소 때문에 비싼 크루저 티켓을 버릴 순 없었다. 

결국 분을 삭이면서 돈을 내주고 말았다. 

몰려든 구경꾼들은 키득거리며 흩어졌다.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구경을 했다는 표정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이런 일을 당하면서도 매번 똑같이 당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잊어요, 뭐 한 두 번도 아니고.”

그래, 이런 일은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속 편하다. 

괜히 계속 생각하고 있어 봤자 기분만 망칠 뿐이다. 


자아! 

다시 기분 전환이다. 

잊자 잊어!


크루저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컸다. 

조그만 아파트 한 채가 바다 위에 떠있는 듯했다. 


타이타닉도 이랬을까? 

게다가 출항시간에 거의 맞춰 도착한 우리는 

실제로 영화 <타이타닉>의 첫 장면에서 디카프리오처럼 

막 출항하려는 크루저를 간신히 세워가며 승선했다.


밤을 이용해 장시간 이동하는 만큼, 가격이 비싸더라도 캐빈(방)을 예약했다. 

그 때문에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과 큰 가격 차이도 없었다. 


하지만, 

크루저를 이용하는 게 돈 때문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크루저라는 새로운 경험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캐빈은 생각보다 좁았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위성 TV도 있고 샤워까지 할 수 있는 조그만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 

말 그대로 아늑한 오두막(캐빈)에 온 것 같은 아늑한 기분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새로운 곳에 도착해 있을 거란 생각에 이미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나는 밤을 이용해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눈을 뜨면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잠든 사이 꿈처럼 이뤄진다는 것에 묘한 즐거움을 갖고 있었다. 


잠시 후 조금씩 바닥이 울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오오! 드디어 크루저가 출항을 한 것이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갑판으로 뛰어 나갔다. 

점점 멀어지는 항구, 부드럽게 흘러가는 바닷바람, 크루저의 주위를 맴도는 갈매기 떼.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시야에서 마닐라가 완전히 사라지자 이번엔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붉게 물들기 시작하던 바다에는 순식간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고, 불빛이라곤 밤하늘의 별이 전부였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을 크루저는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실수로라도 바다에 빠지면 누가 알아채지도 못하겠다.” 

“알아채도 구해주지 못할 것 같은데요?” 

갑판엔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2미터 정도 되는 철망이 쳐져 있었다. 

다행히도 크루저가 뒤집히지 않는 이상 바다에 빠질 염려는 없어 보였다.


“돌고래! 저기 봐봐. 돌고래! 돌고래!” 

갑자기 엘리사가 어린아이 마냥 신나서 소릴 질러댔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어두워서 육안으로 확인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분명 한 무리의 돌고래 떼가 수면 가까이 헤엄치며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오후에 연타로 있었던 택시운전사와 트라이시클운전사의 만행(?)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어느새 기억과 마음속에서 훨훨 털어낼 수 있었다. 


그래,

여행을 하는 이유가 이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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