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성현 Jul 16. 2021

Go! Back?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보라카이




이른 새벽에 보라카이에 도착했다. 

가능한 많은 숙소를 돌아다녀 보고 가장 좋은 곳에 머물기로 했는데,  

짐이 무거웠기에 엘리사가 짐을 지키기로 하고 내가 돌아다니기로 했다.


한 시간쯤 돌아봤을까. 

꽤 괜찮은 숙소를 발견하고, 현장에서 바로 예약을 한 뒤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엘리사는 낯선 사내 셋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이런 곳에선 저렇게 작업(?) 거는 남자들이 꼭 있다.


“너희들 뭐냐?” 

일부러 엘리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큰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내가 아는 엘리사는 나 없이도 충분히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지만.)

 

“얘네, 프랑스 애들 이래. 영어 못해.”

아! 고뢔?


난 왜 푸른 눈에 금발은 모두 다 영어를 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동양인이라고 다 한국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너희 나라 말로 쑥덕대지 마!” 

사내들 중 한 명이 갑자기 소리치는 통에 깜짝 놀랐다. 

아마도 자기들을 가리키며, 우리 둘이 나누는 대화가 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이랑 한국어로 한국말을 하겠다는데, 지들이 뭔데 하라 말라야?

갑자기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에 앞으로 상체를 내밀며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겁 좀 먹었을 거다. 후후.


하지만 정작 겁(?)을 먹은 건 엘리사였다. 

테이블 밑으로 내 허벅지를 꽈악 꼬집으며 하지 말라는 눈치를 보내왔다.

“아! 아! 아! 아파. 꼬집지 마.”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래요?”

“지금 상황이 이래서 그런 거잖아.”

“그렇다고 욕을 해요?”

“그럼 어떻게 하라고.”

“몰라. 욕하지 마.”

자신들과 싸우려다 말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한국어를 알아듣진 못했겠지만) 

우리의 모습에 사내들은 황당해하는 듯했다.

 

“혹시, 신혼여행 온 거야?” 

그나마 좀 멀쩡해 보이는 사내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방금 결혼한 부부다. 어쩔래?” 

“미안해. 그런 줄 몰랐어. 그만 갈게, 미안해.” 

사내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물러섰다.


그런데, 왜 부부라고 말했을까?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순간이지만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곁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나온 김에, 우리 사귈까?”

농담처럼 말하고 말았다. 


정적이 흘렀다. 

엘리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그 말을 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엘리사는 고개를 들고 또다시 한참 동안이나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곤 살짝 웃었다.


“뭐야… 괜히 분위기 이상하게 만드네.” 

“너야 말로 뭐야… 어렵게 용기 낸 건데.” 

이대로 장난처럼 넘어가 볼까? 

아무래도 거절당한 기분인데. 

아니다, 적어도 장난처럼 끝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이 있었어. 그래서 선뜻 슈트케이스도 맡아줬고 하숙집도 함께 알아보러 다녔던 거야. 나 많이 좋아했었어. 가끔 고백받는 상상도 했으니깐.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현실적으로 변하더라. 내가 곧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다시 해야 하는 일, 그리고 내가 왜 필리핀까지 영어 공부하겠다고 왔었나 돌아보게도 되고. 많이 생각해 봤는데 난 아직 할 일이 많아. 그래서 그냥 지금처럼 친구처럼 지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아진다. 

의사였던, 사업가였던, 학생이었던, 한국에선 어떤 생활을 했는지 중요하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똑같이 허름한 옷차림에, 똑같은 하숙집에 머물며, 똑같이 영어 공부를 한다. 

그래서 조건 따위는 보이지 않고 그저 사람의 본질만 보게 된다. 

그것은 순도 깊은 감성을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많은 것을 따지지도 고민하지도 않고 감성에 충실한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연인은 함께이든 따로이든 결국엔 한국에 돌아가게 되고, 

서로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면 현실에 부닥치게 된다. 

너무도 다르게 살던 삶. 

비슷할 거라고 착각했던 모습.

필리핀에 있는 동안 필리핀의 삶이 99였지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면 필리핀의 삶은 추억이 되어버리는 1이 된다.


그래서 친구로 남길 바랬을까?

그런데 그거 알아? 

나 은근히 쿨한 척하려고 하는 거.

하지만 쿨한 사람은 자신이 쿨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이래. 

난.... 사실, 쿨하지 않아. 


“알았어. 하지만 은근히 약 오르네. 내가 그렇게 형편없어?”

“형편없다고 한 적 없어. 그냥 내 감정이 사라졌을 뿐이야.”


사람의 감정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미안할 이유도, 어색할 이유도 없다. 

서로를 존중해 주며 솔직하면 된다. 

어설픈 배려로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쁜 사람으로 남겨지고 싶지 않은 욕심을 부리면 더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게 될 뿐이다.


엘리사는 거절하는 것에 서툰 나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거절당하는 것에 서툴지 않은 나이였다. 


타이밍.

사랑은 타이밍이다.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순 없다지만, 그 컵에 새로운 물을 담을 순 있다. 

로에게 둘도 없는 좋은 친구가 될지, 이대로 영영 멀어지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안녕.

난, 아렘이야.


안녕.

난, 엘리사야.






매거진의 이전글 보라카이행 크루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