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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6. 2021

대낮의 총격전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마닐라 투어 첫날! 자, 가장 먼저 할 일은 쇼핑이에요!”

엘리사는 무척 들떠 있었다. 

밤새 마닐라 투어에 대해 고민했다더니 제법 준비를 많이 한 듯했다.

 

“어디부터 가?”

“쇼핑하면 마카티지요!”

마카티엔 아얄라 거리, 마카티 거리, 에드사 거리를 중심으로 

그린벨트, 랜드마크, 글로리에타, 6750 아얄라 애비뉴, SM 슈마트 등 

수많은 쇼핑몰이 밀집해 있는데 가까운 건물들은 구름다리를 이용해 서로를 연결해주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만약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이 글로리에타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면 

랜드마크나 그린벨트도 글로리에타의 일부라고 오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엘리사는 쇼핑몰을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따라다니던 나는 어느새 여기가 그린벨트인지, 랜드마크인지, 아니면 글로리에타인지 

좀처럼 구분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고, 현기증이 나서 속이 매슥거리기 시작했다. 


엘리사가 마카티로 쇼핑을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양한 쇼핑몰을 한 곳에서 모두 즐길 수 있다는 것만큼 편리한 일이 또 있을까?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 쇼핑몰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만 하자’는 말을 할 타이밍이 언제인지 알 수도 없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뭐예요? 벌써 지친 거예요?"

"아니.... 아까부터 지쳤어."

"에이, 얼른요! 내가 이따가 맛있는 거 사줄게요. 가요, 가!"

쇼핑몰 앞에선 긴 줄을 만들어 순서대로 들어가야 했는데, 

입구에서 가드가 총(?)이나 폭탄(?) 같은 것을 가지고 들어오진 않나 일일이 소지품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총.

폭탄.

사실이냐?

ㅡ..ㅡ


그렇다고 가드가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30센티미터 정도의 막대기로 가방 속을 휘휘 저으며 언뜻언뜻 살펴보는 정도였는데, 

오랜 경험으로 슬쩍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인지, 

귀찮아서 대충 보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 사람 검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초도 채 안 걸리는 듯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총이나 작은 폭탄 정도는 쉽게 가지고 들어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훈련된 개까지 데리고 있는 가드의 모습을 보면, 안전하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설마 쇼핑하다 테러를 당하는 건 아니겠지?’라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엘리사는 지치지도 않는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쇼핑몰 이곳저곳을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무언가 사려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천천히 작품들을 감상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안 사?”

적어도 나는 쇼핑몰에 온다는 건 무언가를 사기 위함이다. 

무것도 살 마음이 없다면 쇼핑몰에 왜 오는가? 


“그냥 보는 거예요.”

예상은 맞았다. 

그냥 보기만 한단다. 

ㅡ..ㅡ


하지만 즐거운 얼굴로 콧노래까지 부를 것 같은 엘리사의 맑은 미소를 보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한걸음 뒤에서 묵묵히 따라다녀주자. 

빨리 사라는 둥, 살 거 없으면 그냥 가자는 둥, 

차라리 쇼핑이 끝나고 어디서 만나자는 둥의 말들로 굳이 즐거운 기분을 깰 필요는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내 눈에도 

쇼핑몰 안을 가득 채운 수많은 물건들이 하나의 작품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쇼핑몰은 수많은 디자이너의 노력이 담긴 작품들로 전시되어 있는 전람회장이 되어 있었다. 


“엘리사?”

잠시 한 눈을 팔았을 뿐인데, 엘리사가 보이지 않았다. 

인파를 헤치고 까치발까지 들면서 찾았지만 보이질 않았다. 


“엘리사!”

다시 목청을 높여 불렀다. 

하지만 그런 날 돌아보는 건 바로 내 곁에 서 있던 사람들뿐이었다. 

‘다 큰 어른이 엄마라도 잃어버렸나 봐’라며 수군거리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만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엘리사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엘리사!!” 

다시 한번 두 눈 질끈 감고, 가장 큰 목소리로 불렀다. 


그 순간! 

내 주위에 서 있던 그 많던 사람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좌우로 퍼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넓은 복도엔 엘리사와 나만이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뭐지?


엘리사를 찾은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당황스러웠다. 

어리둥절하긴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내게 다가온 엘리사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방금 전 내가 큰소리로 ‘엘리사’라 외친 것 때문은 이 소동이 일어난 걸까? 

만약 그게 이 소동의 원인이라면 서둘러 이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뭐해요! 어서 이리로 와요! 건! 건이라고!” 

한 점원이 살짝 열린 매장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다급히 손짓하며 우리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저 멍한 얼굴로 얼음처럼 서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뭐라는 거야?” 

“글쎄, 건? 건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건이 뭔데? 타갈로그어야?” 

“모르지. 혹시 건(Gun)을 말하는 게 아닐까?”

엘리사는 가위 바위 보에서 가위를 내듯이 손가락을 만들면서 날 쳐다보았다. 

“아, 건(Gun)! 맞네, 총” 


가만. 

건(Gun)? 

총이라고? 


순간 우리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점원이 있는 매장으로 몸을 잔뜩 움츠리고 달려갔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이미 사람들은 복도 좌우에 있는 매장들 속으로 급히 몸을 피했던 것이다.

아마 자기들끼리는 '총이다!' 하면서 서로 알아듣고 피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엘리사와 내가 들어오자 점원은 서둘러 문을 잠그고는 긴장된 눈빛으로 밖의 상황을 살폈다. 

가끔 마닐라 지역 한인 신문에 총기 사건이 실리곤 했는데 늘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생각했다. 

현실에선 절대 일어나지 않는,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현장 중심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매장 밖으로 긴 총을 든 가드가 돌아다니며 나와도 좋다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훈련이라도 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유유히 매장을 빠져나갔다.

 

뭐야, 

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행동은. 


난생처음 겪는 일로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일상이려니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점원이 다리가 풀린 우리에게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는 “별일 없는 것 보니 누군가 장난을 친 것 같아요”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장난이라고? 

사람이 해도 되는 장난과 해서는 안 되는 장난이 있지 않은가! 

이건 이미 도를 넘어섰다.


갑자기 엘리사가 웃어댔다. 

“왜 웃어?”

“웃기잖아요. 총이라는 단어를 못 알아 들어서 그 텅 빈 복도에서 멀뚱멀뚱 서 있었던 거.”

생각해보니 꽤 웃긴 상황이었다. 


실제로 총을 든 강도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총앞에서도 멀뚱멀뚱 서 있지 않았을까? 

칼이라면 모를까, 총을 든 강도는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처럼 가깝게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촬영 중인 장소에 들어온 게 아닌가 싶어 미안하다며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이럴 때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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