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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6. 2021

게이쇼 보러 가요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쇼 #게이쇼




“뭐? 게이쇼?”

“응. 한 번 보고 싶어요.”

화려함 만큼은 그 어떤 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게이쇼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쇼 자체보다는 ‘게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말 그대로 게이쇼는 게이가 아니거나, 게이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러니까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감흥도 없는 쇼였다. 

그런 나에게 게이쇼를 보러 가자니. 


아! 왜!


"그곳엔 혼자 가지?'

"왜요? 저랑 마닐라 여행 같이 하기로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 모든 곳을 다 같이 다닐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싫어요. 같이 가요."


아! 그러니까 왜!


"혼자 가서 재미있게 보고 와."

"혼자 가기 무섭단 말이에요...."

"응?"

"그냥, 한 번도 안 가본 곳이라.... 긴장도 되고. 하지만 너무 궁금하단 말이에요."


엘리사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살짝 흥분까지 하고 있었다. 

정말 가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계속해서 졸라대는 통에 알았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가기 싫었다.


“못 들어갑니다.”

입구에서 가드가 막아섰다. 


아싸! 

못 들어간다니 좋았다. 


“왜요? 왜 못 들어가는데요?”

쉽게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나와 달리, 

엘리사는 가드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아! 왜!


"아, 우리가 미성년자로 보였나요? 우리 성인이에요. 외국이라 주민등록증을 보여줄 수도 없고, 이럴 땐 어떻게 하지, 여권을 보여줘야 하나?"

“그게 아니라 맨발로는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응? 

맨발이라고? 

누가? 

누가 맨발인데? 


가드는 날 가리키고 있었다. 

난 분명히 샌들을 신고 있는데 말이다. 

샌들은 신발이 아닌 모양이다. 

맨발이라고 하는 거 보니. 


엄밀히 말하면 내가 신고 있는 샌들은 구멍가게에 담배 사러 갈 때 찍찍 끌고 다니는 슬리퍼가 아니었다.

구멍이 숭 뚫려있는 구두에 가까운 샌들이었다. 

게이 바에 가기 위해 더워서 잘 입지도 않는 흰색 와이셔츠에 맞춰 일부러 신은 건데 

이걸 보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양말을 신으라고 했다. 

하지만 샌들 위에 양말을 신다니. 

그 구린 패션을 나보고 하라고?

차라리 죽음을 달라!


“그냥, 혼자 보고 올래?”

“싫어. 혼자 가기엔 무섭단 말이야.”

풀 죽은 엘리사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돌아서 나오는데 또 다른 게이 바가 보였다. 

처음에 가려던 곳보다는 유명하지 않지만, 그래도 제법 알려진 곳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여기 갈래?”

“여기도 게이쇼하는 데에요?"

"듣기로는."
"그래요? 그럼 가봐요.”

다행히도 그곳에선 샌들만 신고 있어도 별 제지 없이 입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그동안 들어왔던 게이쇼하는 곳과는 사뭇 달랐다. 

분명 입구에서 게이쇼 하는 곳이 맞냐고 확인까지 했는데 말이다.

 

게이쇼는 가족과도 즐겁게 볼 수 있는 곳인데, 

그 안은 질식할 것 같은 짙은 담배 연기만 자욱했다. 

절대로 아이들이랑 함께 올 곳이 못 됐다. 

게다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빛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한 마리 늑대와 같은 눈빛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단 무대 앞 쪽에 자릴 잡고 앉았다. 

이왕 온 거 제대로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드디어 어둡던 무대 위에 서서히 조명이 켜지고, 

언제 등장했는지 한 남자가 잔뜩 분위기를 잡고 서있었다. 

분명 남자였다. 

그것도 우락부락한 근육을 갖고 있는.

 

하긴, 게이쇼에 게이들만 나오는 건 아니라고 했으니깐.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남자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긴 가죽 코트를 입고서, 

끈적끈적한 음악에 맞춰 유연하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저런 큰 근육을 가지고 있으면서 저런 꿀렁거리는 춤이라니.

솔직히 난 그만 됐으니, 나가고 싶었다. 

ㅡ..ㅡ


살짝살짝 보이는 가죽 코트 안엔 짧은 핫팬츠와 긴 가죽 부츠만 신고 있었다. 

이것이 남자가 걸치고 있는 전부였다. 

핫팬츠만 안 입었다면 바바리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흐느적거리던 남자는 갑자기 가죽 코트를 벗어서 무대 뒤로 던져 버렸다. 

순간 관객들은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질러댔다.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살짝 살펴본 엘리사는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민망한지 나와 눈도 못 마주치고 그렇다고 무대 위를 볼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어느덧 남자는 무대에서 벗어나 테이블 위를 거침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무대와 객석을 파괴하는 무척이나 실험적인 무대였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지폐를 흔들어 댔다. 

남자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웨이터가 건네주는 타월을 재빠르게 낚아채 

순식간에 여자들만 있는 테이블 위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그중 한 여자의 머리 뒤로 수건을 두르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춤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수건을 잡게 하고는, 자유로워진 손을 이용해 순식간에 핫팬츠벗어던졌다. 

그리고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눈앞에 구두만 신고 있는 남자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ㅡ..ㅡ ㅆㅂ 눈 버렸다. 

 

더 볼 것도 없이 엘리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둘 다 성인이라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민망함에 한동안 말을 섞지 못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게이 바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트랜스젠더 쇼. 

아직 트랜스젠더가 되지 못한(?) 남자들도 출연해서 그런지 게이쇼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 쇼는 일단 비주얼(?)은 여성들이 나와서 쇼를 보여준다. 

때론 만담 같은 코미디도 하는데, 거의 따갈로그어로 하기 때문에 외국인이 찾지는 않는다.


나머지 하나가, 방금 우리가 보고 나온 진짜(?) 게이쇼. 

관객이 게이들이라고 한다. 

게이들을 위한 쇼로, 무대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등장한다. 

몸도 건장하고.... 암튼. ㅡ..ㅡ  


다음 날, 엘리사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는 건강한(?) 게이쇼를 볼 수 있는 곳을 수소문 하기 시작했다. 

게이쇼를 보러 간다며 즐거워하던 엘리사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얼마나 놀랬을까. 

그리고 그곳으로 안내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나였으니.


“난 아렘이 변태인 줄 알았어요.”

“그런 곳인지 몰랐어.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나서 간 곳인데 나도 처음 가본 곳이라고."

"알아요. 설마, 일부러 그런 곳에 데리고 갔겠어요?"

"미안, 괜히 나 때문에 눈 버렸지?'

".... 응? 뭐...."

"응? 뭐냐.... 그 표정은?'

"아니요, 눈을 버릴 정도는 아니었고.... 나중에 언니들이랑 따로 가야겠다고 생각...."



"암튼, 대신 이번엔 진짜 괜찮은 곳을 알아냈어.”

“믿어도 돼요?”

“응. 그리고 조세핀도 같이 갈 거야. 자기 친구가 일하는 곳 이래.” 

조세핀. 잠시 내 튜터였던 게이다. 


같은 하숙집의 머물고 있는 테미의 튜터가 되는 바람에 자주 얼굴은 마주치고 있었는데 

지난밤 당했던 일을 얘기해줬더니 친구가 일하는 곳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물론 그 친구도 게이었다.

 

조세핀은 우리를 마카티에 있는 조그만 게이 바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의 쇼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익살스러운 코미디와 알아들을 수 없는 타갈로그어로 진행되는 만담. 

그리고 정말 남자(?)가 부르나 싶을 정도로 맑은 음색의 노래까지. 

무척 만족스러운 공연이 이어졌다. 

특히 화려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산들산들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 어떤 여가수보다 여성스럽고 우아한 무대 매너를 보여줬다. 

그제야 엘리사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선 간단한 식사와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쇼를 감상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쇼의 시작과 끝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듯했다.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쇼는 이미 진행 중이었고, 언제든지 본인이 원할 나가면 된다. 


“이제, 나갈까?”

식사를 모두 마치고 간단한 후식까지 맛본 뒤라 갈 준비를 하는데, 

조세핀이 잠시 기다려 달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10분 정도 지나서 다시 나타난 조세핀은 

방금 전 무대에서 만담을 선보였던 여자(?)와 함께 돌아왔다. 

친구이고 이름은 트리샤라고 했다.

 

마침 자신의 공연은 모두 끝났다며 함께 술 한잔 하자고 했다. 

좋다고 하니, 트리샤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무대 뒤로 사라졌다. 


“트리샤는 성전환 수술을 한 거야?” 

“아니야. 필리핀에서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은 거의 없어. 수술비가 비싸기도 하고 종교적인 이유도 있고. 그냥 여장한 거야.”

조세핀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화장을 지우고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난 트리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생긴 꽃미남이었다. 

여자에서 남자로 돌아온 트리샤를 가장 반기는 건 엘리사였다. 

ㅡ..ㅡ (죽일까?)


엘리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색한 기색이 가득했으면서 

이젠 트리샤 옆에 착 달라붙어서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대화는 대부분 트리샤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처음엔 혹시나 실수하는 건 아닐까 조심스러웠는데, 

남자로 변신(?)한 트리샤는 성격도 호탕해 뭐든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오히려 인터뷰하는 것 같아 재미있다고 했다.


Q :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나?

A : 그럼, 넌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데? 


남자에게 왜 남자냐고 묻지 않는 것처럼, 

게이에게 왜 게이냐고 묻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질문이었다.

오케이. 패스. 


Q : 호르몬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A : 대부분 맞지. 그런데 그 호르몬 주사가 상당히 비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점점 안 좋은 길로 빠지는 친구들이 안타깝긴 한데 이해는 돼.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여자이고 싶어 하니깐.


남자들이 근육을 만들고 여자들이 다이어트를 하듯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나에게 호르몬 주사는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Q : 게이로 사는 데 불편함은 없나?

A : 필리핀은 게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야. 그래서 큰 불편함은 없어. 좋은 친구들도 많고. 나는 말이지,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나름 인기가 많아. 


요즘 한국에도 여자들 사이에 게이 친구를 사귀는 게 인기라고 했다. 

미디어의 힘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게이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하고 있기도 하고, 

남자에겐 느낄 수 없는 섬세함과 묘한 동질감 속에서 우러나오는 이해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Q : 여장을 하지 않으면 미남이다. 정말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가?

A : 여자에게 미남이라고 말하면 실례인 것 아니야?


아! 인터뷰 놀이도 점점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자꾸만 남자가 여자고, 여자가 남자고. 

지금 남자랑 얘기하는데, 여자의 입장에서 대답을 하고,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 성 정체성까지도 혼란에 빠지는 듯했다.

 

Q : 마지막 질문. 앞으로 꿈이 뭐야?

A : 연예인이 되고 싶어. 가수가 되는 게 꿈이야.


대부분의 게이들은 이런 무대에 섰다가 관계자의 눈에 띄어 연예계로 들어선다고 한다. 

트리샤도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모두 남자의 모습으로 방송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거절을 했다고 했다.


아, 왜? 

정말 답답했다. 

저 정도의 외모와 신체 조건이라면, 난 바랄게 없이 남자로 살 것 같았다. 

차라리 외모만은 나와 바꿨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둘이 무슨 사이야? 연인이야?”

이번엔 트리샤가 묻고 있었다. 

엘리사와는 평소에도 같이 있는 시간이 많기에 자주 듣는 질문이었다. 

심드렁하게 아니라고 말하려 하는데 엘리사가 먼저 ‘연인이 맞다’고 대답해 버렸다.


“무슨 소리야?”

한국말로 물었다. 

이럴 땐 편하다. 

달리 귓속말로 하지 않고 한국어로 말하면 상대방(현지인)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엘리사는 트리샤의 눈빛을 보고 왜 자신이 그렇게 말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트리샤는 엘리사의 말에 꽤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뭐? 

설마? 

에이, 아니겠지.... 

아니 정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늦은 시간에 같이 술 한잔 하자고 했던 거나, 

내가 궁금해하며 물어보는 모든 질문에 성심 성의껏 대답해 줬던 것까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난 여자보다 게이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 


난 슬며시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엘리사도 기꺼이 협조(?) 해 주었다. 

그 모습에 트리샤는 또 한 번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앞으로 더 예쁜 사랑 해.”

트리샤의 덕담을 끝으로 그날의 만남은 끝이 났다. 

조세핀은 트리샤와 함께 돌아가고 나는 엘리사와 함께 택시를 탔다. 


“이젠 그만 손 좀 놔줄래요?”

아! 미안. 아직까지도 손을 잡고 있는지 몰랐다. 

엘리사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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