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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7. 2021

연애도 타이밍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마닐라베이




엘리사는 ‘마닐라 베이’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거리가 좀 있어서 자주 가지 못한 곳이기도 했지만, 

이젠 갈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엘리사는 조용히, 자신만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마닐라 베이는 나에게도 특별한 곳이었다. 

마닐라에 머무는 동안 밀물처럼 외로움이 덮쳐오는 날이면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곳이 '마닐라 베이'였다. 

그곳에서 붉게 물들며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위로가 되곤 했다. 


마닐라 베이의 일몰은 정말 아름답다. 

하루 종일 내리쬐던 태양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남아있는 모든 열정을 불사 지르기라도 하려는 듯이 가장 강렬하게 불타 올랐다.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오래 볼 순 없지만 

짧기에 더없이 소중했다.


그것은 아쉬움.

세상의 모든 아쉬움은 아름답다.


“남자 친구가 있었어.”

말없이 일몰을 바라보던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문득 떠오른 추억에 젖어하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잠깐 만나 얘기를 나눴을 뿐인데 강한 호감이 생기는 사람이었어. 

다른 건 몰라도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같았어. 

하룻밤 좋은 만남으로도 좋다는 생각이었는데 우리의 만남은 생각보다 길었어. 

잠깐 일 때문에 마닐라에 온 사람이어서 금방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사랑에 빠져버렸어. 

그런데 그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점점 다가올수록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더라.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흐른 탓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매일 만나다 하루는 우연히 다른 약속이 생긴 거야. 

그때 혼자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거지. 

결국, 그 사람과 마주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피했어. 혼자 있고 싶었거든.

해답은 특별하지 않았어. 

단지 두려웠던 거야. 

이별이. 

남겨진다는 게.

어찌어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은 없었어. 

애타게 날 찾았던 흔적만이 남아있었지. 

그 사람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후였어.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고 눈앞에 없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되더라. 

거짓말처럼, 내 감정이 다 소실돼 버린 걸 깨달았지. 

미안한 마음은 들었어. 

처음부터 사랑에 빠지지 말걸. 

그냥 편한 친구로 지냈다면 한국에 돌아가서도 계속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래서 아렘과는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어.”

엘리사는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아 있는 듯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뭘 망설이는 걸까?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걸까? 

하지만 난 섣불리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엘리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데 아렘은.... 이미 친구로 지내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 가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하면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체념하듯 엘리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술 한 잔 할까?”

나는 이런 분위기에선 얘기를 잘하지 못한다. 

맞장구를 쳐줘야 하는지, 장난을 치며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술이나 한잔 하자는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엘리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는 ‘이스트우드’로 자리를 옮겼다.

이스트우드는 꽤나 분위기 좋은 카페와 바가 몰려있는 곳이다. 

거리까지 나와 있는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산미겔 한 모금을 들이켜면,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쓸어 내려가는 기분 좋은 곳이다. 


마닐라 베이에서 이스트우드까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어서 

우리는 한참을 택시 안에서 말없이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일부러 이스트우드를 택했다. 

화려하고 활기찬 이스트우드의 기운을 받고 싶었다. 


택시에서 내린 엘리사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힘없이 축 처진 어깨가 측은하게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그래서 한 걸음 앞선 엘리사를 두 걸음 쫓아가 손을 잡았다. 


잠시 어색함이 맴돌았지만 나는 곧바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앞뒤로 세차게 팔을 흔들었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엘리사가 투정을 부렸지만 조금씩 분위기는 좋아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어디선가 들리는 음악 소리를 쫓아가 보니 근사한 거리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가끔 거리에선 무료 콘서트가 펼쳐지기도 한다. 

무대 위에서 들려주는 생생한 라이브 연주를 듣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하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무대에서 열창하는 밴드에게 미안할 정도로 관객은 많지 않았다. 


“아! 이 노래!”

무대 위 이름 모를 무명가수가 부르고 있는 노래는,

오지 알카시드(Ogie Alcasid)가 부른 ‘Bakit Ngayon Ka Lang’이었다.

번역하면 ‘왜 이제야(Why, are you late)’ 정도의 말이다.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났냐는 아쉬움을 담고 있는 노래였다. 

모든 가사를 정확히 해석할 순 없었지만, 노래에 담긴 애절함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Bakit ngayon ka lang dumating sa buhay ko

Pilit binubuksan ang sarado ko nang puso

Ikaw ba ay nararapat sa akin

At siya ba’y dapat ko nang limutin

Nais kong malaman bakit ngayon ka lang dumating

‘Bakit ngayon ka lang’ by Ogie Alcasid


그리고 이 노래가 끝나기 전, 

난 잡고 있던 엘리사의 손을 놓았다.


왜 이제야.

연애도 타이밍. 


이 밤이 지나면 우린.

안녕.


https://www.youtube.com/watch?v=oFNnSS8xn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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