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향 마닐라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헤어짐 #마지막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왠지 구슬프게 느껴졌다.
그렇게 좋아하는 비인데 오늘따라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곧 비는 멈췄지만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안티폴로 마운틴’에 있는 ‘파디스 포인트’라는 바는 마닐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마닐라의 마지막 모습은 먹구름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끝내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이렇게 돌아서 외면하면 미안해서 떠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끝내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떠나야 하는 사람은 떠나고 만다.
“날씨 정말 최고네.”
엘리사는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것은 마닐라가 전하는 아쉬움 가득한 손길이었다.
이별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떠나는 사람에게나 남겨지는 사람에게나 이별은
아련한 아쉬움을 남기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가슴을 죄어온다.
And if forever’s not enough for me to love you
I’d spend another lifetime baby,
If you ask me to
There’s nothing I won’t do
Forever’s not enough for me to love you so
<Forever’s not enough> by Shrah Geronimo
“나, 내일 송별회 때 누가 노래시키면 이 노래 부르려고. 올 거지?”
나 역시도 마닐라처럼 외면하면 미안해서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가고 싶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리는 내 모습에 엘리사는 실망했다.
빈말이라도 꼭 가겠다는 대답을 해줄 수 없는 거냐고 했다.
결국,
엘리사의 송별회엔 가지 않았다.
“진짜 안 오는 거야?”
송별회가 끝나가고 있을 시간에 전화가 왔다.
조금은 술에 취한 목소리의 엘리사였다.
전화기 건너편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직접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엘리사의 안부였다.
분위기를 보니 괜찮은 듯했다.
조금씩 ‘떠남’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떠남과 남겨짐 중, 난 떠남을 좋아한다.
떠남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남겨짐은 아픔을 남긴다.
“대신, 내일 공항에 같이 가줄게.”
“그래… 알았어.”
“늦었어. 자.”
“응.”
전화를 끊고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엘리사와 함께하는 기억이 없게 된다는 사실이 아팠다.
생각해보면, 필리핀에 있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못지않게 수많은 필리핀의 모습과 마주했다.
이 모두에 일일이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난다 해도, 날 욕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
이별은 간결하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다음날 공항까지 엘리사와 동행했다.
엘리사의 얼굴에는 그동안 정들었던 필리핀을 떠난다는 아쉬움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기대감이 공존해 보였다.
“가고 나면 읽어봐.”
엘리사는 꼬깃꼬깃 접은 새하얀 쪽지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출발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기 전까지 오랫동안 말없이 날 안아 주었다.
“안녕.”
‘안녕’이란 말로 시작된 엘리사와의 인연은 ‘안녕’이란 말로 끝나버렸다.
엘리사를 만나서 ‘아렘’이란 이름을 말하는 순간 크랭크인되었던 나의 영화도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갔다.
돌이켜보니, 일 년 넘게 필리핀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지냈던 것 같다.
나 역시, 이곳 필리핀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엘리사가 전해 준 쪽지를 펼쳐 보았다.
쪽지엔 짧은 한 문장만 쓰여있었다.
구구절절이 참 많은 말들이 쓰여 있을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하지만 그 외엔 달리 할 말이 없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그 짧은 한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깐.
그거 알아?
난 결국 너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는 걸.
이젠 너도 알지 않을까?
그때 필리핀에서 만났던 아렘이란 친구가
감성현이라는 걸.
그리고,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연락해, 삼겹살에 소주나 한 잔 하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