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1
새벽부터 거미줄처럼 뻗은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의 골목 구석구석을,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지붕 삼아 거닐고 또 거닐었다. 두근거림. 과거의 시간 속으로,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걷는 걸 좋아했다. 어른들은 진득하니 앉아 있으라고 했지만, 그러면 내 머리는 굳어져 도통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멍해지기만 했다. 좁은 방 안이라도 빙빙 거닐어야 굳었던 머리는 기름칠한 듯,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생각이 막히면, 산책을 나선다. 한참을 머리를 비우고 정처 없이 거닐다 보면 머릿속이 차곡차곡 정리되면서 부드럽게 돌아가고, 곧 원하는 답을 찾아내곤 한다. 그렇게 수많은 고민들도 거닐며 털어냈고, 살아가기에 해야 했던 수많은 다짐들도 거닐며 했다. 여행은 어디론가의 도착이 아닌, 끝없이 이어지는 걸음의 연속이라 생각한다. 거닐며 만나는 그 모든 낯선설렘이 좋다.
어느새,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서 있는 건물 사이로 빨래가 널렸고, 굴뚝에선 아침을 준비하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맛있게 구워지는 빵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속에서 여전히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믿을 수 없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들에게 역사는 어느 시점에서 끊어내어 정리하거나 보전해야 하는 과제가 아닌, 그저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이었다.
#2
여행은 흐르는 물과 같다. 흘러가는 내내 마주치는 수많은 만남들에 즐거워한다. 그러다 댐이라도 만나 고이기 시작하면 여행은 잠시 끝나는 듯하다. 흐르는 물을 막아서서 가둬두니 얼마나 답답할까? 그동안 마주쳐온 만남들을 추억하며 그 답답함을 달래보지만, 그럴수록 계속해서 흘러가고 싶은 마음만 더 간절해진다. 언젠가 저 닫힌 수문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린다. 물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죽어버린다.
자, 수문이 다시 열렸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 왔다. 인터넷만 연결되면 스스로도 떠나왔는지, 남아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기에 가져온 디바이스도 당분간 꺼두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여행에 익숙해질 때까지만이라도. 해방이다. 자유가 밀려와 반갑게 안아준다.
#3
두브로브니크의 가장 유명한 성벽 위를 거닐기 전에 작은 생수를 한 병 사기로 했다. 상점 주인은 한국어를 못했고, 미안하게도 난 크로아티아어를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굳이 영어로 대화하려 하진 않았다.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서로가 필요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어떤 언어보다 편안하고 정확한 대화를 나눴다. 단 한마디의 입술의 대화가 없어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처음 해외로 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난다. 자는 거, 먹는 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살면서는 너무 사소해서 단 한번도 걱정조차 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걱정됐고 두려웠다. 가장 두려운 건 의사소통이었다. 만국공통어라는 영어도 사실, 안 통하는 나라가 더 많다. 게다가 여행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영어는 무용지물이 되곤 한다. 그럼에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여행을 한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는 입술이 아닌 눈으로 할 때, 더 진실되고 많은 마음을 나눌 수 있다.
#4
걸음을 멈춰 선 건, 조금의 그늘도 찾기 힘든 두브로브니크 성벽 위였다. 아침인데도 생각보다 더웠다. 성벽은 그 품에 수백 채의 빨간 지붕들을 고이 안고 있었다. 밖에서 불어오는 한없이 부드러운 아드리아해의 바람은 성벽을 타고 올라와 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바다 특유의 비릿한 내음도 없다. 비릿하지 않은 바다. 차라리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호수 같았다. 모든 게 따뜻하고 푸근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은 그 평온함을 파괴했었다. 세르비아군을 주축으로 한 유고 연방군이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에 퍼부은 포격으로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내전 후 시민들이 사력을 다해 도시를 복구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기저기에서 부서진 전쟁의 잔해들이 보였다. 그걸 보고 있으면 그때의 공포와 절규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조차 몰랐을 만큼 평온했지만, 지금의 평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랐을까? 그 희생으로 내가 여기에서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숙연해졌다.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버린 시공간 속에 멈춰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