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1
며칠 동안 소박하고 한적한 작은 도시에만 머물렀던 탓일까? 스플리트에 도착하자마자 머릿속이 핑 돌며 현기증이 났다. 누군가는 스플리트가 소도시의 소박함이 느껴진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작은 마을만 봐오던 터라, 나에겐 스플리트가 대도시처럼 느껴졌다. 버스터미널과 기차역과 항구, 그리고 구시가는 가깝게 오밀조밀 모여 있는 탓에 많은 사람들로 매우 수선스럽게 들끓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뭐라도 먹고 보자 했는데, 허기까지 쏙 들어가버렸다. 일단, 멀미 날 것 같은 교통의 중심지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해안을 따라 시원하게 뻗은 리바Riva 거리에 도착하니, 겨우 한적해졌다. 그제서야 해안 특유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해안을 따라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여유로웠다. 함께 산책하는 강아지도 여유로웠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마저도 한 번의 날갯짓으로 오랫동안 체공하는 여유로움을 보여줬다. 그 속에 스며들어, 낮잠과도 같은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오랜만이었다. 은퇴한 뒤의 삶은 이런 걸까?
스플리트는 로마의 황제 가이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Gaius Aurelius Valerius가 영토를 지키는 일도,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을 견제하는 것도, 정치에서도 지쳐가던 와중에 결국 은퇴를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와 남은 삶을 살 곳으로 선택한 도시라고 한다.
#2
스플리트의 어시장에 들렀다. 거대한 갈매기들이 어슬렁거리며 생선가게 주인이 버리는 생선의 내장이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다들 열심히 일했다. 주인은 주인대로 열심히 손님과의 흥정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갈매기는 갈매기대로 그 틈을 타 먹이를 노리고 있었다. 둘 다 먹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저렇게 살아야 할까? 쉬고 싶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활기 넘치는 시장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은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스플리트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은퇴의 도시다웠다.
사람들은 은퇴를 위해 일을 하는 걸까? 일에서 쉬고 싶어서 은퇴를 하는 걸까?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결국 어느 순간엔 그 띠를 끊어내고 멈춰야 한다. 여행은 이러한 끊어냄에 대한 예행연습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벗어나 본다.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의외로 많은 여행자들이 자신을, 자신의 일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3
스플리트에서 차를 빌리기로 했다. 이용하려는 렌터카 회사가 제법 커서, 차를 빌린 뒤 다른 도시에서 반납해도 된다고 했다. 게다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다. 비용 면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대중교통비가 저렴한 편이 아니었기에 여행의 일부 구간 정도는 차를 빌려 운전하는 편이 더 나았다. 해외에서 운전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경험 삼아 마음 편히 차를 빌리기로 했다. 언제 또 크로
아티아에 와서 아드리아해를 따라 달려볼 수 있겠어. 이 정도의 사치는 누구라도 이해할거야. 시티팝을 들으며 석양이 떨어지는 해안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거야. 어떤 차가 좋을까? 그래! 미니 쿠페! 평소 좋아하는 미니 쿠페를 타고, 아름다운 크로아티아의 해안도로를 달릴 생각을 하니 몸서리치게 행복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정해진 예산에서 빌릴 수 있는 차는, 수동이고, CD조차 들어가지 않고, 내비게이션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차색깔이다. 같은 종류라도 좋으니 색이라도 바꿔달라고 했는데, 딱 잘라 없단다. 한 단계만 더 높이면 원하는 색의 차로 준비할 수 있다고 꼬셔대는데 약이 올랐다. 누가 모르니?
#4
차를 빌렸다. 수동이고, CD조차 들어가지 않고, 내비게이션도 없는 차다. 특히 내비게이션에 길들여진 탓에 어떻게 운전하나 걱정도 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이미 오래 전부터 길은 여행자를 충분히 안내해주고 있었다. 차의 색깔도 중요하지 않았다. 차 안에서 운전하는 중에는 어차피 볼 수 없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끝내 이상을 위해 지르지 못하고 현실을 선택했다. 그 망설임을 내내 지켜보던 직원은, 결국 내가 가장 낮은 수준의 차로 확정을 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주의사항 교육도 속사포 랩퍼처럼 빠르게 떠들고는 차 키를 건네주고 가버렸다. 그 얄미운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이래서 사람들은 일을 하는가 보다. 은퇴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한 보다 나은 현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