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치, 계산

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by 감성현

#1

브라치로 향하는 배에서 폭우를 만났다. 사방을 둘러봐도 육지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폭우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자동차까지 실을 수 있는 아주 큰 배라 뒤집히지 않을 거라 안심을 하면서도, 갑판 위로 사정없이 쏟아지는 비바람을 보고 있으면 슬그머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다행히도 브라치에 가까워지면서 폭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브라치엔 대표 항구가 두 개 있다. 대부분 여행자는 스플리트를 통해 들어오는 수페타르Supetar 항을 이용한다. 상대적으로 여행자가 적은 수마르틴Sumartin 항은 비수기와 겹치면서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비수기는 그랬다. 막상 와 보니 운행 노선도 줄었고, 운행 시간도 없어졌다. 섬이라 그런지 택시도 없었다. 하지만, 여행이 그렇지 뭐. 당황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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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펼쳤다. 지도의 축척을 확인하고 어림잡아 손톱으로 재가며 계산해 보니, 수마르틴 항에서 내가 가려고 하는 즐라트니 라트Zlatni Rat 해변, 일명 고깔 해변까지의 거리는 대략 30km였다. 마라톤이 42.195km니까, 그보다 짧은 거리였다. 걸어 갈까? 그래, 여행은 걷는 거잖아!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걸어서 가기로 했다.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하는 마음이라 걸음걸음이 모두 즐거웠다.


하지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2

얼추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오기도 하고, 이 정도면 많이 왔겠지 싶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조금 멀긴 했지만, 내가 타고 온 배가 또렷하게 보인다. 수마르틴 항이 그대로 보이다니! 지도를 보니 겨우 2, 3km 정도 왔을 뿐이다. 발바닥이 뜨거울 정도로 걸은 것 같은데 고작 그거라니. 불안했다. 뭐가 잘못된 거지? 불길한 예감에 찬찬히 다시 한번 계산을 해봤다. 수마르틴 항과 고깔 해변까지의 거리가 30km. 시속100km로 달리는 자동차로는 3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짧은 거리다. 사람은 어떤가? 평균적으로 사람이 걷는 속도는 시속 4km. 한 시간에 4km를 간다는 말인데, 30km라면 4*8=32. 8시간?! 다시 계산을 해봐도 8시간이었다. 고깔 해변에 도착해서 바닷물에 발만 담그고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왕복 16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이제 고작 한 시간 남짓 걸어왔을 뿐이다.


계산만으로 이미 지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대로라면 다 때려치우고 수마르틴 항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마지막 배편은 6시간도 안 되어 끊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돌아가겠다고? 잠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어떻게 할지 몰라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는데, 내 앞으로 차 한 대가 지나갔다. 나 좀 태우고 가지. 아! 맞다! 히치하이크! 워낙 숫기가 없는 탓에 지금까지 단 한번도 히치하이크를 해본 적 없었지만, 절실

했다. 히치하이크를 하겠다고 마음먹고도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만큼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가끔 지나가는 차들이 나타나면 반갑게 손을 흔들어 댔지만, 낯선 이방인에겐 쉽게 서주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다 포기하고 수마르틴 항으로 돌아가야 하나 체념하고 있을 때, 저 멀리 작고 낡은 차 한 대가 털털거리며 오는 게 보였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두 손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어? 우측 깜빡이를 켠다. 그리곤 조금씩 차선에서 벗어나더니 거짓말처럼 내 앞에 얌전히 멈춰 섰다. 어? 진짜 섰다. 한동안, 낡은 차와 난 멍하니 마

주 서서 서로를 바라봤다.

“어디까지 가니?”

“즐라트니 라트요.”

할아버지는 그곳은 크로아티아의 수많은 해변 중에서도 단연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라는 말과 함께,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저 산을 넘으면 된다며 따뜻한 미소를 건네 왔다. 눈물 나게 친절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히치하이크로 남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수마르틴 항과 고깔 해변의 중간 지점 정도 되는, 산꼭대기 어딘가에 차를 세우더니 이제부터 방향이 갈라지니 내리라고 했다. 날벼락이었다. 이런 줄 알았다면 애당초 차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내리면 고깔 해변은 고사하고 수마르틴 항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둘러보니 끝없이 뻗은 도로와 그 옆으로 넓은 포도밭만이 휑하니 펼쳐져 있었다. 잠시 그렇게 주변을 탐색하고 있는 사이 친절한 할아버지는 엄지손가락까지 치켜세우곤, 해맑게 손까지 흔들며 떠나갔다. 태양은 점점 머리 꼭대기로 올라오고 있었다. 강렬한 뜨거움이었다. 더 이상 차들도 지나가지 않았다. 아니,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혹하리만치 적막했다. 게다가 얼마나 넓은 허허벌판인지 한참을 걸어도 풍경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마치 제자리를 맴도는 듯했다. 그게 더 지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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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몰라, 몰라! 자포자기하고 길가에 자라 있는 석류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쉬고 있었다. 주먹만하게 잘 익은 석류가 먹음직스러웠다. 타는 듯한 갈증에 앞뒤 안 가리고 석류를 따서 먹었다. 주인이 있다면 빗자루를 들고 쫓아 나오겠지. 오히려 그래 주길 바랐다. 그렇게라도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정신마저 몽롱해지기 시작할 무렵, 신기루처럼 노란 벤 한 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반가웠다. 강아지 꼬리 흔들 듯, 손을 높이 쳐들고 미친 듯이 좌우로 흔들어 댔다. 멈춰 선 노란 벤은 우편차였다.

“어디까지 가세요?”

“즐라트니 라트요. 중간에 내려주면 안 돼요. 꼭 즐라트니 라트 해변까지 데려다 주세요. 제가 정말 죽을 것 같거든요. 멀리 한국에서 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잖아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참을 떠들었다. 하지만 우체부 아저씨는 영어를 못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가신다고요?”

“…… 즐라트니 라트.”

그게 대화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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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얻어 탔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차 안의 분위기는 서벅했다. 우체부 아저씨도 서먹한 기류를 느꼈는지 크로아티아어로 이것저것 물어오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얻어 타는 고마움에 하나라도 성의껏 답해주고 싶었는데,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 두 남자는 나란히 앉아 침묵 속에 앞만 보며 달렸다.

정말, 한참을 더 달렸다. 지도로 확인했던 것과는 달리, 구불구불 산 외곽을 타고 도는 길이라, 거리도 늘어나고 속도 또한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이런 거리인 줄도 모르고 걸어서 오려고 했다니, 다시 생각해도 소름 끼치도록 어이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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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기까지 오는 데 마음고생이 심해서였을까? 힘들게 도착한 고깔 해변은 생각보다 섹시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누드비치도 식상했다. 게다가 고운 모래사장이 아닌, 신발을 신지 않으면 걷기조차 힘든 작은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이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지압매트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겨우 이걸 보자고 그 고생을 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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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짚어 보니,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이 더 아름다웠다. 잠시 앉아 쉬었던 석류나무 그늘이 더 시원했다. 새콤달콤한 석류도 맛있었다. 지나오는 길의 모든 걸 잊고 있었다. 어디든 멈춰서 그곳에 머물면 그게 여행인 것을,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수마르틴 항으로 돌아가기 위한 히치하이크 때엔, 오롯이 그 자체를 즐겨야겠다. 조급해 하지 않고 스쳐가는 모든 풍경을 눈에 담고, 그 순간을 사랑하고 가슴에 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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