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1
한정된 시간을 쪼개 써야 하는 여행에서 가장 아까운 건, 다름 아닌 잠자는 시간이다. 매번 야간 이동을 강행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시간을 잘 맞춰서 이른 아침에 다음 도시에 도착하는 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다.
시간이 애매할 때도 있다. 비수기라 그런지, 밤 늦게까지 버스가 운행되지 않았다. 하루 더 머물던지, 아니면 늦은 밤에나 다음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가장 빠른 버스 시간은 늦은 아침이었고, 어중간한 한낮에 도착해서는 꼬박 하루가 날아가버리게 되는 셈이라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루치 늘어나는 숙박비는 문제가 아니었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여행하는 타입이라, 늦은 밤에 도착하면 숙소를 잡을 수나 있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금새 날이 저물었다. 버스가 달려가는 도로엔 가로등 하나 없는 탓에, 밤의 깊이는 훨씬 진하고 무서웠다. 어느새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비 내리는 풍경에 흠뻑 젖어 어울리는 음악이라도 찾아 들으면서 기분을 냈을 테지만, 그 순간엔 걱정만 앞섰다.
밤 늦게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도 걱정인데, 숙소를 찾아 이 빗속을 헤맬 생각을 하니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 가려고 했던 도시는 두어 시간 더 가야 했지만, 중간에 내리기로 했다. 충동에 가까운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이른 시간에 숙소를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예정에도 없던 도시는 마카르스카였다.
#2
나쁘지 않았다. 마카르스카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지만, 작은 도시가 아니었기에 생각보다 숙소는 많았다. 크로아티아에 숙소가 많은 이유는 크로아티아의 숙박 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크로아티아에는 매년 전체 인구인 약 450만 명의 2배가 넘는 수의 여행자가 찾아온다. 호텔과 호스텔만으로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서 정부는 일반 가정집도 허가만 받으면 숙박업을 할 수 있도록 정책을 만들었고, 그에 따라 SOBE라고 불리는 민박이 크로아티아 전역 골목골목에 생겨났다. 여행자들은 침대 그림이 그려진 파란 SOBE 간판이 붙어 있는 집을 찾아 문을 두들기기만 하면 된다.
한 시간 정도 발품을 팔아서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았다. 대문에 SOBE 간판이 붙어 있다.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인상 좋은 할아버지와 그 뒤에 서서 어깨 너머로 날 살펴보는 할머니, 그리고 그들만큼이나 늙어 보이는 커다란 반려견 한 마리가 날 반겼다.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다소곳이 손을 모아 귀 옆에 대고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가 곧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슬쩍 슬쩍 내 뒤를 살핀다. 이 정도는 그동안의 여행 경험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일행은 없고, 나 혼자라며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또 무언가를 물어온다. 이번엔 손가락을 둘 들어 보였다. 며칠을 머물지 물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떡인다. 이제 비용을 지불해야 할 차례다. 평소라면 계산기를 꺼내서 협상을 시도하지만, 레인커버를 단단히 씌워 놓은 배낭을 풀어헤치고 꺼내기 귀찮아, 지갑을 통째로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필요한 액수만큼 가져간 뒤 거스름돈까지 꼼꼼하게 챙겨준다. 정직하고 정겨웠다. 이렇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방을 구했다.
#3
새벽녘. 천둥소리에 잠에서 깼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두들겨대는 창문 너머, 번쩍하고 번개가 쳤다. 그리고 우렁찬 천둥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 번쩍거리는 날카로운 선을 반복해서 바라보니, 사진으로 담아내고 싶었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번개사진은 어렵다. 타이밍을 맞추기도 힘들지만, 어디서 번쩍일지 예측하기도 힘들다. 그냥 혹시나 했다. 꼭 찍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우산 하나 받쳐 들고 비 내리는 새벽 거리로 나왔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 깨어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 도시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거닐다 보니 항구까지 왔다. 요란한 하늘에 비해 바다는 번개가 번쩍일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 잠잠했다. 허공을 향해 사진기를 들었다. 우산 밖으로 나간 손등 위로 빗물이 떨어졌다. 사진기에 물이 들어갈 것만 같아 서둘러 셔터를 눌렀다. 딱 한 번이었다. 그 순간 번개가 쳤다. 정확
히 사진기가 향한 방향이었다. 어리둥절했다. 확인해 보니 정말 번개가 담겨 있다. 단 한 번의 촬영으로 번개를 찍은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선물 같았다.
여행사진이란 그런 것 같다. 미리 준비도 할 수 없고, 일부러 계산도 할 수 없는, 한 순간의 찰나. 그것은 행운이자 신이 주는 선물이다.
만약 어제, 지난 도시에서 하루 더 머물고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면 어땠을까? 달리는 버스에서 무작정 내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쏟아지는 폭우를 핑계로 새벽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난 이토록 멋진 자연의 일부를 볼 수 있었을까? 사진에 담아낼 수 있었을까? 모든 건, 충동이었다.
어느새 새벽의 끝자락에서 비는 멈췄다. 우산을 접고 작은 등대 아래 앉아, 저 멀리 터오는 먼동을, 이번엔 사진이 아닌 가슴에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