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1
프리모슈텐에 방문하자,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레고 성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안에라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이 작은 도시를, 맛있는 케이크를 아껴 먹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아껴가며 거닐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느림의 미학. 일상의 모든 것을 중간에 끊어내고 떠나온 여행인데, 이제서야 느낄 수 있는,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로였다.
차 한 대 지나가지 않은 일차선 도로가 그랬고, 만들어진 시기를 가늠할 수 없는 낡았지만 야무진 베이지색 자동차가 그랬고, 건물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기다란 벤치가 그랬다.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그랬고,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지만 조급해 하지 않는 주인의 표정이 그러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내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었다. 거닐면 거닐수록, 느리면 느릴수록 지치고 상한 마음은 위로받고 치유되었다.
#2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크로아티아에서 만난 도시들은 하나같이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듯했지만, 특히 프리모슈텐에서의 시간은 더욱 그랬다. 덩달아 이곳에 머무는 낯선 여행자의 모습도 한적한 풍경만큼이나 여유롭게 변했다. 어쩌면 그동안 나의 시간만이 어처구니없는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던 건 아닐까? 돌아보면 언제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나만 훌쩍 자랐고, 늙어 있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이곳에서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고 느끼게 되는 건 아닐까.
#3
어려서부터 시간을 기준으로 모든 계획을 세우도록 배웠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동그란 접시를 가져다 예쁘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스물네 조각으로 나눈 뒤, 각 시간마다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웠다. 조금의 자투리 시간도 용납하지 않았다. 만약, 네 시간 정도를 뚝 떼어서 ‘혹시 모를 무언가를 대비한 시간’으로 적어 놓는다면 장난하냐며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처럼 모진 매타작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는 여유분이라는
게 있고, 예비금이라는 게 있는 것이 당연한데도 말이다.
시간이 아닌, 해야 할 일에 대한 리스트가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안에 끝내려고 하는 연습은 좋다. 하지만 만족하든 안 하든 정해 놓은 시간이 되면 무조건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습관은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니다. 시간이 부족했다면, 잠을 줄이거나 급하지 않은 일을 뒤로 미뤄서 그만큼의 시간을 확보하면 된다. 그래야만 결과물이 좋다. 그래서 ‘혹시 모를 무언가를 대비한 시간’은 쓸모없이 버려지는 시간이 아닌 꼭 필요한 계획의 일부이다. 반대로 시간이 남으면, 다음을 위해 휴식을 취하든지, 자신도 모르게 받고 있을 스트레스를 풀어가야 한다. 기계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휴식 없이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4
어느 날 예고도 없이 3일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까?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거나, 미뤄두고 쌓아뒀던 영화와 책을 실컷 본다거나, 게임 속 캐릭터를 키운다거나, 어디든 좋으니 일단 여행을 떠난다거나, 뭐든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하려고 할 것이다. 삶의 계획표에 ‘혹시 모를 무언가를 대비한 시간’을 넣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시간 낭비라고 할지도 모른다. 어제 죽은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던 내일인데, 시간을 그따위로 낭비하지 말라고 격하게 나무랄지도 모른다. 빈둥대지 말고 뭐라도 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과 다른 내일을 살기 위해선 쉼이 필요하다. 내일도 오늘 같다면, 내일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오늘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끊임없이 살아가는 건, 오늘과 다른 내일을 살기 위한 준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헛되지 않은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