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베니크, 표정

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by 감성현

#1

성 야곱St. James 대성당 외벽을 따라 조각된 다양한 얼굴상은 그 당시 쉬베니크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흘러간 세월만큼 비바람에 닳아서 그 표정들은 희미해졌지만, 72가지나 되는 표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보고 있자니 상상이 펼쳐졌다.


조각가는 아이가 처음 글을 읽는 법을 배우듯, 표정도 읽는 법을 연습했다. 물론, 표정을 읽는 법은 너무나 어려웠다. 표정을 지었던 상대방이 거짓으로 아니라고 하면 자신이 읽은 바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증명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표정을 읽는다는 건, 감정의 확인이 아닌, 공감이었으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짜증스런 표정. 위로를 해주고 있지만 고소해 하는 표정. 헤어지게 돼서 속 시원하다고 하지만 슬퍼하는 표정. 그래서 조각가는 말보다 표정을 더 믿었다. 말로는 감출 수 있을지라도 표정을 보면 금방 솔직한 진심을 알 수가 있었다.


조각가는 매일 아침, 광장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관찰했다. 표정은 엄청나게 다양했다. 사람마다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수십 가지도 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조각가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사람마다 시시때때로 표정이 바뀌긴 하지만, 사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고유한 표정이 한 가지는 꼭 있다는 사실이었다. 빵집 할아버지는 언제나 시무룩한 표정. 꽃집 아가씨는 언제나 즐겁게 웃는 표정. 산에 살면서 가끔 마을로 내려오는 나무꾼 총각은 언제나 불만 가득한 표정. 일곱 아이를 키우는 아줌마는 언제나 못살겠다는 표정. 그 집 막내 아이는 언제나 장난칠 게 없나 살피는 얄미운 표정.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조각가는 조각가답게 그 표정들을 조각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성 야곱 대성당 외벽을 따라 다양한 얼굴상은 조각되었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내 얼굴이 어떻게 저러냐고, 하소연을 해댔다. 밝으면 밝은 대로 실없다고 싫어했고,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암울하다고 싫어했다. 그러면서 조각가의 얼굴은 어떤 거냐고 물었다. 분명 가장 아름답고 멋진 얼굴일 거라고 생각했다.


“저는, 제 얼굴을 조각할 수 없었습니다. 불행히도 저는, 제가 가진 표정을 알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조각된 얼굴상이 자신의 얼굴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제 옆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정말로 닮지 않았는지.”

조각가가 말을 끝내자, 사람들은 정말 조각된 것과 자신과 닮았냐고 서로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똑같은데 뭘.”

“닮았구먼. 당신, 이렇게 생겼어.”

“잘 만들었네, 잘 만들었어.”

여기저기에서 상대방의 얼굴 표정이 조각된 얼굴의 그것과 같음을 인정했다.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동시에 하나의 표정을 하고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멋쩍은 표정이었다.


짧은 소동은 그렇게 막을 내렸고, 쉬베니크의 얼굴상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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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진을 잘 찍는 후배가 있다. 언젠가 사진 몇 장을 뽑아와서 내게 내민 적이 있는데, 나도 모르는 날 찍은 사진들이었다. 느낌이 좋은 순간에 찍었던 것들이라며 선물로 내밀었다. 분명 사진들 속의 인물은 나였다. 하지만 하나같이 다 내가 아닌 듯 낯설었다.


“언제 찍은 거야?”

사진들 중에, 유독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을 하고는 무언가에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그거? 전에, 우리 모임 있던 날. 다 같이 술 마실 때잖아요.”

술 취했을 때였어? 꽤나 해맑아서 궁금했는데 고작 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았던 거구나. 왠지 모르게 씁쓸해 하고 있는데, 후배가 말을 이었다.


“그때 들려줬던 줄거리. 언제 책으로 나와요?”

“응?”

“준비하고 있다는 글 말이에요. 완전 재미있어서 거기 있던 사람들 다 빠져 들었었는데. 선배, 그 이야기할 때 표정이, 완전 아이처럼 해맑았던 거 알아요? 그때 거기 있던 사람들 다 그랬어요. 선배, 진심이구나, 진짜로 좋아하는구나, 하고 말이에요.”

기억을 되짚어보니 그날이었다. 기억났다. 그때였구나. 내가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가끔, 글 쓰는 게 너무 힘들고 지치곤 한다. 왜 이러고 있나 싶은 때가 가끔 있는데, 그때마다 이렇다 할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면서 또 글을 쓰고 있는 나였다. 글이란, 카페에 앉아 살랑거리는 바람을 느끼면서 우아하고 낭만적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책상 주위로 온갖 자료들이 붙어 있고,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있어서 허리는 부러질 듯 쑤셔오고, 엉덩이도 아프다. 손목에 무리가 와 밤새 끙끙 앓기도 하고, 정신적으론 말할 것도 없으며, 피곤한 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사진 속 내 얼굴에 담긴 표정을 바라봤다.

이제는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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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상상에서 깨어나 돌아왔다. 아드리아해가 눈앞에 펼쳐지는 식당

에 앉아 있었다. 바닷가에 자리 잡은 식당답게 구운 생선 요리가 일품이었다. 나온 음식

을 한입 삼키다가 문득 지금의 내 표정이 궁금했다. 테이블 위에 컵을 세워 놓고, 카메

라에 타이머를 걸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렌즈를 바라봤다.

찰칵.

아쉽게도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며칠째 깎지 못한 수염이 제멋대로 들쑥날

쑥 나 있고, 제때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지 못해서 얼굴은 핼쑥하고 푸석했다. 그래도

눈망울만큼은 선명하고 또렷했다.

해맑았던 그날의 표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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