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1
그날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흐름을 놓칠까 책상 앞을 떠나지도 못하고, 끙끙거렸다. 다행히도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부분을 일순간에 풀어낼 꽤 근사한 문장이 떠올랐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미친 듯이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물리적인 시간을 제외하곤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좋아, 좋아.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끝이다. 그런데 어라? 갑자기 눈앞이 깜깜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곁의 모든 불빛이 순식간에 나갔다. 켜 놓은 음악 소리도 순식간에 흔적을 감추고 쿨링팬(Cooling Fan) 돌아가는 소리도 힘없이 줄어들더니 이내 멈췄다. 적막했다. 정전이었다.
빌어먹을! 작업하던 모든 문서가 날아갔다. 저장을 했었나? 아니다. 한창 잘 풀리고 있었던 탓에 신나게 써내려가기만 했다. 중간에 저장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세 시간 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을 텐데, 세 시간 전이라면, 아까 막혀서 애를 먹고 있던 부분이다. 어떻게 풀어냈었지? 기억을 되짚었지만 이미 머릿속이 새하얘져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문장이 뭐였지? 뭐였더라? 실성한 사람처럼 어이없어 웃었다. 그러다, 온갖 찰진 욕설을 내뱉었다. 괴성을 지르며 발을 구르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팔다리를 마구 흔들며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한참이나 넋이 나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어디까지 정전이 된 걸까? 도시는 어두웠다. 어둠 속에 파묻힌 도시가 무척이나 어색하고 낯설었다. 도시의 어둠은 익숙하지 않다. 잠들었다기보다는 죽어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불빛이라도, 있어야 도시는 도시답다.
그리고 나에겐 작지만 새로운 징크스가 생겼다.
불빛이 사라진 죽음 같은 도시는 악운을 선물한다.
#2
자다르도 마찬가지였다. 가로등도 없는 끝없는 길을 몇 시간째 달리고 있었다. 어둠을 좋아하지만 불빛 하나 없는 어둠은 싫다.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분명 이정표를 잘 보고 달리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정표에 자다르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기름도 바닥이 났다. 계획대로라면 자다르에 도착하고도 남을 만큼의 가솔린이 있었는데. 필요치 않은 지출이었다. 달리 유턴을 할 수 없는 도로라서 되돌아가는 것도 맘처럼 쉽지 않았다.
한참이나 더 달리자 작은 주유소가 나왔다. 그제서야 멈출 수 있었다. 자다르의 방향을 물었더니 반대쪽이란다. 한참을 지나왔다고 한다. 분명 중간에 자다르로 빠지는 길이 있었나 본데 보지 못하고 시원하게 지나쳐 온 거였다. 방법은 없었다. 가솔린을 채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 밖에.
여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왔던 길을 돌아갈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미치도록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유독 여행에서는 더 심하게 느껴진다.
#3
늦은 밤에 도착한 자다르는 최소한의 불빛만이 잠들기 직전의 도시를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어두움에 사고는 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차를 몰고 몰아 자다르의 중심부로 들어섰다. 자다르의 명물, 바다 오르간Sea Oragan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네 번 정도 같은 곳을 지나쳤고, 일곱 번 정도 길을 물어봤다. 같은 곳을 빙빙 돌았을 뿐이다. 그냥 포기하고 잠이나 자러 갈까? 열 번 정도 고민했다.
우여곡절 끝에 바다 오르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도의 높낮이에 따라, 구멍이 난 방파제 보도 아래로 파도가 밀어 넣는 공기(기압)에 의해 소리가 나는 원리란다. 총 35개의 파이프가 자연의 힘에 의해 연주되는 놀라움이라고 적혀 있었다. 찾아오느라 지치기도 많이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아 바람에 실려오는 연주 소리에 눈을 감았다.
어둠에 감춰진 바다는 파도 소리만으로 그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 파도 소리는 거대한 파이프를 타고 노래를 부른다. 고래가 포효하는 울림 같았다. 희한하게도 그 소리가 푸근했다. 바다의 연주라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슴이 편안해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여행에 지친 몸과 마음을 내려놓았다. 불빛이 사라져가는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더 깊게 들려왔다. 깊고 진한 어둠 덕분에 눈을 감지 않아도 충분히 그 소리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 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방해가 되는 때도 많다. 그럴 때마다 눈을 감는다. 더 깊이 느끼고 싶기에. 더 진하게 간직하고 싶기에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파고든다.
한참을 더 그곳에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도시의 품에 안겨 취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