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1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예상했던 시간은 이미 훌쩍 넘겨 버렸다. 분명 지도로 거리를 확인했을 땐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판단했다. 하지만 8번국도의 사정을 미처 알지 못한 불찰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해도 짧았다. 멋들어지게 물드는 석양도 잠시, 붙잡을 새도 없이 아드리아해 속으로 태양이 그 모습을 감춰버리자, 기다렸듯이 짙은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설상가상으로 가로등도 없어서, 내가 몰고 있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
빛만으로 달려야 했다. 게다가 지도상에는 매끈하게 빠진 일직선 도로였는데, 실제로는 수많은 융털처럼 꾸불꾸불했다. 고작해야 20km로 달릴 수 있을까? 그 이상의 속도로 달린다면 커브길에서 차가 뒤집혀서 절벽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도로 곳곳에는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을 애도하는 화환이 계속해서 놓여 있었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갓길보다 더 들어간 공간이 나오자마자 주저 없이 차를 세웠다.
살고 싶었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차박이 시작되었다.
#2
노숙이긴 하지만 차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별 도움은 못됐다. 뚝하고 떨어진 추위는 히터를 틀어도 그때뿐이었다. 가솔린을 아끼기 위해 계속 틀어 놓을 수도 없었다. 배낭을 열어 옷이란 옷은 다 꺼냈다. 위아래 구분 없이 일단 손과 발을 끼워 넣었다. 우비도 입고 수건도 덮었다. 그래도 추웠다. 견디다 견디다 견딜 수 없으면 히터를 틀었고, 조금 괜찮아진다 싶으면 곧바로 히터를 껐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뜬눈으로 추위를 견뎠다. 불빛 하나 없는 탓에 별이라도 실컷 보겠다 싶었는데, 뭔 구름은 그렇게 잔뜩 끼었는지. 별은 고사하고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행이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것만 기억하기 때문일 거다.
밤이 참 길었다.
#3
계획에 없던, 또는 가이드북에도 나와 있지 않은 도시에 들르게 되면, 나만의 도시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누구나 한번은 들어는 봤지만, 실제로 가본 사람은 없는 전설 속 도시를 나 혼자만 다녀온 기분이랄까? 차 안에서 오돌오돌 온몸을 떨고 있는데, 신기루처럼 저 멀리 불빛 하나가 보였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카를로바그라는 작은 도시였다.
무엇에 홀린 듯,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 불빛을 등대 삼아 천천히 차를 몰았다. 가장 먼저 반기는 종탑 아래 차를 세웠다. 아까 봤던 불빛은 이 종탑을 비추고 있던 불빛이었다. 여전히 차 안에서 비박을 하는 신세였지만, 마음은 훨씬 안정적이고 편안했다. 거기에 앉아 글을 썼다. 참 많은 글을 그곳에서 썼다. 어느새 차창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어디를 가나 새벽이 오기도 전에, 어슴푸레 해가 뜨기 훨씬 전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있다. 낯선 동양인이 그 시간에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나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다 한결같이 깜짝 놀랐다. 잠이 덜 깬 카를로바그는 무척이나 순박하고 정겨웠다. 거리는 깨끗하고 간밤에 내린 이슬에 반들거렸다. 어디에나 한 명씩은 꼭 있는 조용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마음이 안정되자, 거대한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식당도 없어서 서둘러 세워둔 차로 돌아왔다. 의자를 뒤로 눕히고 나도 따라 누웠다. 차장 밖으로 점점 하늘이 밝아오는 게 느껴졌다. 반대로 난, 깊은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곧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겠지? 차 안에서 널브러진 채 잠들어 있는 낯선 동양인이 신기해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쳐다볼지도 모른다. 아, 모르겠다.
너무 졸리다.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