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혼자

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by 감성현

#1

안개에 가려, 길이 꺾어지는 걸 보지 못했다. 그 길엔 가드라인도 없었다. 덜컹하는 충격에 곧바로 차를 세웠는데, 내려서 보니 바로 바닷물 아래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찔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소름이 끼쳤다. 깊은 낭떠러지는 아니어서 큰 인명사고까지는 없었겠지만, 먼 타국에서의 사고는 분명 불편하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일상에서도 죽음을 접하는 경우는 많았다. 지금까지 주위의 크고 작은 교통사고만 열번도 넘었으니까. 하지만, 술자리의 안주거리 정도로 곧바로 잊어버리는 일들이었다. 그럴 수 있는 건, 일상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일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기억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려보낸다.


반면, 여행에서 만난 죽음은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이 된다. 두고두고 꺼내서 이야기한다. 기록에도 남겨둔다. 그래서 같은 죽음인데도, 여행에서의 죽음은 더 강렬하기도 하고, 오래 기억된다.


그리고 당신이 그랬다. 당신을 만난 건,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이었다. 당신과의 이별은, 두고두고 꺼내서 이야기하는, 여행에서의 죽음처럼 머릿속 깊이 아프게 새겨져 쉽사리 이젠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 여행을 다녀온 뒤라도, 언제든지 또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더 근사한 사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사랑은 여행이다. 한 번의 여행을 끝으로 다시는 여행할 수 없는 게 아니듯, 사랑이 끝나도 또 다른 사랑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지울 수는 없다. 아무리 지우고 싶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여행 중 하나만 골라서 내 삶에서 지워낼 수 없듯, 당신을 지울 수는 없다. 그리워한다거나, 아직도 사랑한다거나,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다. 당신은 내게,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연애와 닮아 있다.



#2

날 뻔한 사고에 뒤늦게 손발이 떨려왔다.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들숨에 들어오는 안개 낀 바다는 온몸의 세포를 다 깨울 만큼 차갑고 깨끗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잠시 걷기로 했다. 이럴 땐, 참 많은 생각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생각이 많아진다.

혼자 여행을 떠나왔다. 방금 전처럼 사고가 있을 뻔하면, 혼자 여행을 떠나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둘, 혹은 여럿이 떠나는 여행을 꺼리는 것은 분명 아니나, 나 외에 누군가를 챙기고 신경 쓰지 않기에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혼자만의 여행을 좋아한다. 그만큼 혼자만의 여행은 비어 있다. 그 빈 공간은 거니는 걸음걸음마다 떠오르는 수많은 상념들로 채워진다.


사랑, 미련이기도 하고, 이별, 아픔이기도 한다. 후회와 반성을 하기도 하고, 또는 수많은 계획이 세워지기도 한다. 얼토당토않은 단편의 줄거리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3

그날도 어김없이 상상 속에 푹 빠져서 걷고 있었다.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서 돌아보니, 내 곁에는 손을 꼭 잡고 함께 발걸음을 맞춰 거닐던 당신이 있었다. 당신은 방긋 웃으며 다시 돌아갈까 하고 물었다. 난 그러자고 대답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오던 길을 되돌아 우리는 돌아갔다.


당신은 단 한 번도, 함께 있는 당신을 잊을 만큼 깊은 상상에 빠져드는 내게 화내지 않았다. 늘 아무 말 없이 행여나 내가 발을 헛디디지 않게 옆에서 손을 꼭 잡고 길을 안내해 주는 쪽이었다. 가끔은 대화를 하다가 말고, 수첩을 꺼내 떠오른 단상들을 적기도 했다. 다 적고 나서야 당신의 말을 잘랐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웃었다. 그 모습이 나인데 왜 미안하냐고 했다. 사랑하기에 괜찮았고, 괜찮기에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산책을 끝내고 차 한 잔을 마실 때 즈음에서야 거니는 내내 내 머릿속을 채웠던 상상들을 들려달라고 했다. 당신은 그런 내 이야기를 듣는 걸 즐거워했다. 그리고 난 즐거워하는 당신을 보는 걸 좋아했다. 지금에서 다시 생각해봐도, 당신만큼 내게 잘 맞춰주며 함께 걸어주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혼자 여행을 떠나왔다.

당신 같은 사람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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