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라, 후유증

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by 감성현

#1

풀라에 머물면서 차를 반납했다. 반납 장소는 풀라에서 조금 떨어진 공항. 생각보다 공항이 작아서 버스터미널인 줄 알았다. 차를 반납하고 다시 풀라로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타야 했다. 비수기라 버스가 운행되지 않는다고 했다. 택시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차를 반납하자마자 차가 그리워지는 상황이었다. 뭐든 있다가 없으면 작든 크든 후유증을 남긴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사랑이든, 여행이든.


여행은 언제나 심한 후유증을 남긴다. 여행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도 한동안 자주 만나는 이유다. 여전히 대화는 여행에 머물러 있고, 아직은 식지 않아 따끈따끈한 여행의 기억들을 안주 삼아 여행후유증을 달랜다. 일상에 돌아와도 한동안 여행후유증에 시달리며 힘들어 한다. 고작 일주일 남짓의 짧은 여행이라도, 너무나 쉽고 허무하게 마음을, 일상을 흩트려 놓는다. 지독한 공허함을 끝내 떨쳐내지 못하고 곧바로 또 다시 여

행을 떠나기도 한다. 어쩌면 여행은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고마운 녀석이 아닐지도 모른다. 천사의 웃음을 한 이면에는 악마의 미소를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알고 있음에도, 심한 후유증에 시달릴 줄 알면서도, 떠나고 떠나고 또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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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풀라에서 심한 여행후유증이 밀려왔다. 여행 도중에 여행후유증이 생기긴 처음이었다. 여행을 하고 있으면서 여행이 그리웠다. 방법이 없었다. 이미 여행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도 치유할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괜히 눈물이 났다. 언젠가 아침. 먼저 눈을 뜬 난, 곁에 곤히 잠든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울음을 터뜨리며 당신을 끌어안은 적이 있다. 곁에 있는데도 몹시 그리웠다. 그리운 그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당신을 끌어안고 또 끌어안았다. 그럼에도 좀처럼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잠에서 깬 당신은 놀란 눈을 하고서도 곧 나보다 힘껏 나를 안아주었다.


여행을 하고 있으면서 여행이 그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다. 그래서 곧장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풀라에서의 일정을 서둘러 정리했다. 지금은 머물기보단 어디로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죄여오는 가슴을 열고 다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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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여행자들이 많았다. 커다란 배낭. 편한 옷차림. 아무렇게나 앉아서 허기를 달래고 있는 그들을 보니까, 서서히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나 혼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에 걸린 것 같은 괴로움은 사라졌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구나. 그들도 각자 마음 속엔 가볍든 무겁든 여행후유증을 하나씩은 갖고 있는 거겠지.


타고 있던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덜덜거리는 버스의 진동이 느껴지자, 얼었던 손을 따뜻한 물에 담근 것처럼 확하고 마음을 풀린다. 도시를 뒤로하고 긴 국도에 들어서자 여행후유증을 삼킬 수 있었다.


여전히 난, 여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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