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예카, 일상

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by 감성현

#1

리예카는 다른 느낌이었다. 일상이 이뤄지고 있는 대도시의 느낌이었다. 그래서 머무는 동안 수산시장도 가고, 재래시장도 찾았다. 사람들은 활기찼고, 목소리는 크고 정신이 없었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모습은 똑같다. 그래서 그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쌈짓돈이 오갔고, 생선과 채소가 오갔다.


봐도 봐도 재미있었다. 영화 촬영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DSLR로 촬영하는 요즘 방식이었다. 독립영화였는지 조명도 적고, 배우들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배우들은 자연스럽게 시장 사람들에 묻혔다. 나 역시 그러고 싶었다. 처음부터 살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살아보고 싶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도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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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패스트푸드 매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며칠째 방전되었던 스마트패드를 충전했다. 그동안 이 종이 저 종이에 적었던 여행의 기록들을 정리하여 옮겨 적고, 수십 통의 메일도 일일이 확인했다. 급하다고 판단되는 메일은 짧게나마 답장도 썼다. 쓰는 김에 몇몇 지인에게 메일을 보냈다. 예전엔 머무르던 곳의 풍경이 담긴 엽서를 사서, 밤새 꾹꾹 눌러가며 안부를 적고는, 다음 날 우체국을 찾아서 보내곤 했는데, 이제는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을 찾는다. 엽서는 정성이고, 메일은 그렇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 메일 한 통 확인하고, 보내는 것도 여행 중에는 쉽지 않으니까. 다만, 사라져가는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웠다. 마지막으로 페이스북을 열었다. 그동안 찍었던 사진 몇 장을 올린다. 그 순간 세상에서 사라졌었던 내가 모습을 드러내 나타난다. 멀고 먼 이국 땅에 있으면서도 연결되는 순간, 다른 사람들과 같은 동네, 같은 공간에 있는 착각이 들었다. 얼마 후, 알림 소리를 내며 댓글들이 올라왔다. 성질 급한 녀석은 메신저로 직접 말을 걸어왔다. 지구 반대편에 있더라도 옆에 있는 것처럼 편하게 대화 나눌 수 있는 세상이다. 잠시나마 반가운 수다를 떨다가 페이스북을 닫았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일상을 살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떴을 때, 책상 머리맡에 붙여 놓은 저 풍경사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은 상상. 영화 <점퍼>의 주인공 데이빗 라이스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러고 있지 않은가! 연결을 끊는 순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도시로 와 있었다. 불과 일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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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염없이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다리가 아프면 배낭을 깔고 앉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봤다. 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그들이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나에겐 여행이었지만, 그들에겐 일상이었다. 여행자에겐 언젠가 한번은 와보고 싶은 도시 중 하나일지라도, 정작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이 사람들은 잠시 숨을 돌리고 떠나고 싶어하는 곳이었다. 누구나 한 번은 일상에서 벗어나길 꿈꾼다. 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길 꿈꾼다. 충분하지 않았다면 아쉬워는 하겠지만 그래도 결국 일상으로 돌아간다. 가장 익숙하고 편한 곳. 그곳

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다시 벗어날 계획을 세운다. 일상이 이렇다. 안기면 벗어나고 싶고, 벗어나면 다시 안기고 싶은.


당신이 대했던 나처럼.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나처럼.

일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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